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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주요 인사이자 중국 민영 과학기술 기업의 개척자인 만룬난(萬潤南)이 10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그의 생애는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경제 발전의 상징이자, 동시에 민주화 운동의 비극적 여운을 함께 품은 궤적이었다.
1946년 장쑤성 이싱에서 태어난 만룬난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출발했다. 1984년, 그는 7명의 동료와 함께 단 2만 위안을 대출받아 쓰퉁(四通, Sitong) 회사를 설립했다.
불과 3년 만에 매출이 5억 위안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하며, 쓰퉁은 중국 민영 과학기술 기업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혔다. 그는 시장 개방과 기술 혁신의 상징으로, ‘중국식 실리콘밸리’를 꿈꾸던 세대의 선두에 있었다.
그러나 1989년 봄,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자, 만룬난은 다른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당시 그는 정부 고위층과 학생 지도자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았다.
장인이었던 리창(李昌)은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로, 유혈사태를 우려하며 사위를 통해 학생 지도자들에게 철수를 권고했지만, 역사의 흐름은 피로 물들고 말았다.
톈안먼 사건 이후 만룬난은 ‘학생 운동 지원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졌고, 결국 해외로 망명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파리에서 다른 반체제 인사들과 함께 ‘민주 중국 전선(Democratic China Front)’을 결성하고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제2, 제3대 주석을 맡으며 중국 내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위한 해외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활동은 중국 정부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지만, 그는 줄곧 “민주주의는 인민의 존엄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중국 본토에서 금기시되었으나, 해외 중국인 사회에서는 톈안먼 세대의 상징으로 기억되어 왔다.
만룬난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 각지의 중국 민주화 인사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다. 한 동료는 SNS를 통해 “그는 중국의 양심이었고, 혁신과 자유를 동시에 믿었던 마지막 세대였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망명 인사는 “만룬난의 삶은 실패로 끝난 혁명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여정이었다”고 평가했다.
만룬난은 생전 인터뷰에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불완전한 꿈이지만, 그 꿈을 포기하는 순간 국민은 다시 노예가 된다”고 말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민주화 운동이 교차했던 시대를 온몸으로 산 그의 생애는, 오늘날 중국 사회가 여전히 직면한 질문을 남긴다 — 경제 발전 뒤에 감춰진 자유의 대가는 무엇인가.
“나는 언젠가 조국의 하늘 아래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 만룬난, 1993년 파리 인터뷰 중에서
장·춘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