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49] 성공회의 상상 질서
  • 에프라임 래드너 Ephraim Radner is professor of historical theology at Wycliffe College. 윌클리프 칼리지 교회사 교수

  • 필자는 오랫동안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의 대연도(Great Litany) 가 성공회 신앙의 기원적 성격을 가장 온전히 드러내는 기도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이름처럼, 이 연도는 참으로 “충만한” 기도문이다. 1544년,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국가적 비상사태를 위해 작성한 장문의 기도문으로, 곧 공동기도서에 포함되어 주 3회 낭송되는 개혁 성공회의 정규 예전이 되었다.

    이 연도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아우른다. 온갖 죄로부터의 용서와 구원, 악한 통치자와 이단, 종교적 무관심으로부터의 보호, 사회적 불의와 폭력으로부터의 구원, 자연재해·질병·돌연사·최후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청한다.

    또한 연약한 자와 고아, 포로와 억류자, 여성과 어머니, 어린이,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자비를 청하며, 믿음의 갱신과 회심, 원수에 대한 사랑을 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기도의 중심에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수난, 죽음, 부활의 진리와 은총이 선포된다.

    이 기도의 포괄적 야망은 창조와 섭리, 심판과 구원을 포함한 하느님의 모든 경륜을 인간의 삶 속에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 나 자신의 삶뿐 아니라 이웃의 삶까지도. 이러한 신앙 표현으로서 ‘대연도’는 성공회가 지닌 풍성하고 공동체적이며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존재의식을 보여준다. 곧 교회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복합적이고 공유된 신앙 질서 — 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두터운 상상질서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대연도’를 함께 바치는 신자조차 드물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쇠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지만, 신앙적 공포를 느끼지는 않는다. 교회의 수적 규모가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를 가늠하는 척도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마태 22,14). 필자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이를 구원하시길 희망하지만, 그 희망은 결코 확실하지 않으며 세상의 현실은 그 반대를 증언한다. 따라서 필자가 속한 성공회 전통의 흔들림을 지켜보며 진행하는 이 관찰은 신학적 판단이라기보다 사실의 진술에 가깝다. 그러나 그 징표들은 직시할 필요가 있다.

    서방의 성공회는 오늘날 극도로 “얇은(thin)” 교회적 상상질서로 전락했다. 표방하는 이상과 실제가 모두 그렇다. 성공회는 이제 “신조 외에는 아무것도 본질이 아니다”라는 축소된 신앙 이해 — 일종의 신조적 근본주의(creedal fundamentalism) — 에 갇혀 있다. 표면적으로는 단단한 원칙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신조 외의 모든 것은 선택 사항”이라는 결론이 따른다. 그리하여 결국 “신조조차도 무관심한(creedal indifference)” 상태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 결과, 신앙의 실재는 인간의 삶의 경험과 거의 닿지 않는다. 부모, 자녀, 남녀의 결혼, 인간의 육체라는 창조 질서조차 부차적인 관심사로 밀려났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인간을 붙드는 구체적 요소들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쾌락과 정치, 돈, 마약, 스포츠, 오락, 자선 활동 등이 메운다. 서구의 성공회 신자들의 삶은 세속인들의 삶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얇은 신학은 얇은 실천으로 이어진다.

    물론 어떤 이는 반론할 수 있다. “성공회 예전은 본래 매우 풍성하지 않은가?” 그러나 일상의 시편기도(Daily Offices), 주일 교리교육과 강론, 성체성사를 위한 도덕적 준비, 개인의 성경 묵상과 관상 기도 등은 사목 현장과 사제들의 모범 속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교우들은 그저 “도덕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활동”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것이 삶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세례, 견진, 혼인 건수가 급감한 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 이미 “부풀지 않는 케이크”가 되어버린 신앙 현실의 단면일 뿐이다.

    예외도 있다. 미국에서 성공회(Episcopal Church)를 떠나 북미성공회(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 ACNA)를 세운 분열, 그리고 서방 각지의 유사한 움직임은 과거 성공회 유산의 “교리적·경건적 두터움”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실제로 그런 열매도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활동성 자체가 신앙의 두터움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상업화된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음악과 미디어, 정치적 진영 논리, 도덕적으로 얄팍한 설교가 오히려 이 시도를 훼손했다. “두터운 교회적 상상질서”의 회복 대신, 교회는 미국의 문화적 분열 속으로 떠밀려갔다.

    이러한 희석은 “보수적”이라 불리는 영역에서도 계속되어왔다. 한때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초기 교회선교회(CMS) 선교사들을 영감의 모델로 삼았던 전통적 성공회 복음주의의 진지하고 풍요로운 영성은, 1980년대 이후 미국식 대중 복음주의가 영국교회를 침투하면서 서서히 부패해갔다.

    유감스럽게도 이 현상은 이제 아프리카 성공회 전체로 퍼져 있다. 물론 아프리카 교회는 여전히 “두터운 성공회 정신”의 중심축으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이 전한 기도서 복음주의(Prayer Book Evangelicalism) — 그리고 이후 보다 가톨릭적 색채를 띤 영성 — 는 본래 공동체적 삶과 창조 질서에 깊이 뿌리내린 아프리카 문화와 공명했다.

    ‘대연도’는 여전히 많은 아프리카 기도서에 남아 있으며, 그 안의 기도는 인간의 실존 전체 — 출생, 부모, 형제, 노동, 수확, 결혼, 전쟁, 기근, 폭풍, 적대, 권위, 노인, 자녀, 질병, 세대, 죽음 — 를 하느님의 섭리와 교회의 전례 안으로 포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결합되어 있다.

    20세기 초 동아프리카 부흥운동(East African Revival)은 이러한 전통을 더욱 심화시켰다. 십자가와 참회 중심의 신앙(유럽 기준으로는 중세적 경건)에 토착적 감수성을 결합하여 공동체 전체를 변혁시켰고, 지역 문화와 신앙을 하나로 통합했다. 이후 오순절적 신앙의 감정적·표현적 요소가 성공회 예전과 융합되어,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는 “신앙의 두터움”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 역시 상업 복음주의의 유입으로 희석되고 있다. 세련되지만 속이 빈 콘텐츠, 외부 제작물, 인터넷과 가상의 교회문화는 경제적 궁핍 속 청년층에게 “화려한 신앙의 환상”을 팔며 퍼져나간다. 그러나 현실의 제약 — 불안정한 전력, 미비한 통신망, 불안한 사회 구조 — 은 오히려 하느님의 현실적 섭리를 체험하게 한다. 아프리카의 신자들은 여전히 질병과 불안, 가난 속에서 하느님께 삶 전체를 내맡기는 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삶의 전 영역을 하느님의 구원 행위로 경험하는 신앙의 생동감은 여전히 서구보다 훨씬 강하다.

    가톨릭 교회는 본질적으로 “두터운” 교회이다. 일곱 성사 — 특히 혼인, 고해, 병자성사 — 는 인간의 존재 전 과정을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은총 안에 결속시킨다. 이에 비해 개신교가 두 가지 “주님의 성사”(세례와 성찬)에만 머무르는 것은 신앙의 폭을 제한한다.

    오랜 세월 동안 성공회는 명목상 개신교이면서도 중세의 성사적 실천을 기도서 안에 보존함으로써 이러한 약화를 피했다. 또한 성경 중심주의도 신앙을 “두텁게” 하는 효과를 냈다. 개인의 성경 통독은 영국을 불과 몇십 년 만에 유럽에서 가장 문해율이 높은 나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 두터운 신앙 실천들 — 성사와 말씀 — 역시 점차 선택 사항으로 전락하며 약화되었다. “굳이 해야 하나요? 할 일이 너무 많잖아요.” 이런 식으로, 신앙의 풍요는 “세계적 교회 온난화(global ecclesial warming)” 속에 녹아내렸다.

    필자는 이제 단 하나의 가능성만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전 지구적 규모의 재앙이 다시금 교회적 상상질서를 “두텁게” 만들 것이다. 우리를 생명의 절벽 끝으로 몰아붙여 풍요의 마취에서 깨어나게 하는 사건, 다시금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안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는 사건 말이다.

    이것이 바로 ‘대연도’ 가 태어날 때의 절박한 영적 감각이었다. 그리고 이제 신학적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 감각을 다시금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0-17 06:39]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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