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는 최근 인도 방문 중, 10억 명이 넘는 인구의 생체정보를 보유한 인도의 아드하르(Aadhaar) 디지털 신분등록제도를 “거대한 성공”이라 치켜세웠다. 그는 이 제도의 핵심 설계자 중 한 명인 난단 닐레카니(Nandan Nilekani)와의 회동에서, 영국이 추진 중인 자국의 디지털 신분증이 아드하르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칭송했다.
스타머는 벵갈루루와 마네사르의 요새 같은 데이터 저장시설을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의 광경을 상상해 보면 그 또한 감탄했을 것이다. 도시 밖의 교통 정체와 인파로 가득한 거리와 달리, 그 데이터 서버들은 냉방이 잘 된 단지 안에서 일정한 전자음과 함께 정밀하게 돌아간다. 마치 혼란스러운 장면에서 멸균된 병실의 침상으로 전환되는 영화 한 장면처럼, 기술관료적 총리 스타머가 맥박치는 거리에서 데이터베이스의 ‘삑삑’ 소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몸체’, 즉 ‘국민’이라는 존재의 모습이다.
영국 정부가 이 질서 정연함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쉽게 이해된다. 사회적·경제적 무기력 속에서 ‘완전한 정보’의 약속은 일종의 치유제처럼 느껴질 것이다. 9월 말, 영국 노동당 정부는 ‘브릿카드’(BritCard)라는 의무적 디지털 신분증 제도를 발표했다. 겉으로는 노동 자격을 증명하고 불법 이민선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라 했지만, 2006년 토니 블레어 정부의 신분증 계획이 실패했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새 포장 속의 낡은 처방전’을 곧바로 알아볼 것이다.
이민 문제가 설득력을 잃자 정부는 ‘공공 서비스 접근성’과 ‘사회적 포용’, ‘공과금 고지서를 찾을 수 없는 불편함’ 등 그때그때 다른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 변덕스러운 명분들의 이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분명하다. 브릿카드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자체가 국민에게 있다’는 생각을 숨기기 위한 장치다.
브릿카드는 단지 눈에 띄는 하나의 사례일 뿐, 이미 정부 운영 전반이 ‘공중보건식 인구 위험 관리’ 모델로 변해가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로랑 바로니앙(Laurent Baronian)이 말한 “무한 포위”(infinite envelopment)의 시대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철도 건설 같은 외연적 확장으로 팽창하지 않는다. 대신 내부로 향해 새어 나가는 틈을 봉쇄하고, 모든 흐름을 규제한다. 성장의 한계 앞에서, 사회는 자기 안으로 침잠하고 규제 중심적으로 바뀌며, 더 이상 개척의 위험을 꿈꾸지 않는다. 대신 데이터가 끝없이 회전하며 내는 기계적 윙윙거림, 그 ‘질서’만을 꿈꾼다.
물론 디지털 신분증이 ‘편리하고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그럴듯한 면이 있다. 불법 거래를 억제하고, 모든 일이 법적 절차 안에서 ‘계수’되도록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확인 절차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방화벽이 불법 선박을 돌려세우지는 않는다.
더 깊은 의도와 논란의 소지가 이 제도 뒤에 감춰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계속해서 증식하는 명분들이다. 어제는 불법 이민 방지책이었고, 오늘은 공공서비스 이용권이며, 내일은 복지 사기나 “온라인 위해” 방지를 위한 조치가 될 것이다. 정부는 당장은 생체정보를 수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대 디지털 세계에 맞게 갱신된 전자비자나 여권처럼, 생체인증의 기초로 사용될 사진을 포함한다”는 설명에서 그 모순이 드러난다.
노동당계 싱크탱크인 ‘Labour Together’가 제시한 청사진은 디지털 신분증을 통해 정부가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과제들”—예컨대 “유해한 온라인 콘텐츠”나 “보건의료의 효율화”—에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ID 생태계’를 그린다. 흥미롭게도 이 구상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그 동력으로 삼는다. 팬데믹이 ‘통합된 디지털 신원체계’의 필요성을 드러냈다고 주장하며, 만약 그것이 존재했다면 얼마나 ‘매끄럽게’ 통제가 이루어졌을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보편적 건강’이 얼마나 쉽게 ‘보편적 복종’으로 전환되는지를 드러낸다.
공중보건은 ‘통제’를 ‘돌봄’의 언어로 포장하는 강력한 도덕적 수사법을 제공한다. “도움을 받는 데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말은, 사실상 ‘감시의 눈 밖에서 침묵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주어져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디지털 신분증을 둘러싼 ‘형평’과 ‘포용’의 담론 역시 진보적 언어로 들리지만, 사실상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후기 자유주의(post-liberal)적 주체 관리 체제는 필연적으로 ‘포괄적’이다. 누구도 그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은 ‘숫자화’ 되어 계수되어야 한다.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따라서 위험 회피적 정부에게 인간은 ‘정비’되어야 할 대상이다. 스타머를 감탄시킨 아드하르 제도는 지문과 홍채 정보를 은행 계좌에 연결한다(관리당국 UIDAI는 은행 정보를 직접 보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위험은 분명하다). 비판적 사고를 가진 이라면 캐나다 트럭 운전사들의 ‘탈은행화’ 사태나 나이절 패라지(Nigel Farage) 같은 인물들이 계좌를 박탈당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중국의 ‘사회신용제도’가 비판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영국 내무부는 이미 브릿카드가 “현재 밝힌 것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왜 안 되겠는가? 한 번 구축된 인프라는 다음 위기를 기다린다. 또 다른 팬데믹, ‘기후 재난’, ‘허위정보’, 혹은 단순히 ‘증오’라는 이름의 새 비상사태를 위해서 말이다.
사회는 해체되어 가고 있으며, 그 불안은 더 크고 더 깊은, 더 ‘포위된’ 형태의 통제를 갈망하게 만든다. 언론인 피터 히친스(Peter Hitchens)는 “영국 정부는 국경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이제 국민 모두에게 ‘호흡 허가증’을 발급하려 한다”고 썼다.
우리는 이제 쇠락의 연옥(purgatory) 속에 살고 있다. 오늘과 다른 미래는 없다. 단지 같은 현실이 더 조여질 뿐이다. 감시는 언제나 ‘편의’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내적 논리상, 감시는 단순히 우리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조정’하고, 일탈을 ‘매끈하게 다듬어’ 사회 전체가 데이터 모델처럼 마찰 없이 돌아가도록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데이터가 아니다. 인간은 ‘고장 난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다. 삶은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관리 계층이 결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