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저녁, 우리가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필자는 스스로의 선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스무 마일이 넘는 길을 걸으면 온몸의 근육이 쑤신다. 필자는 맨바닥에 깔린 천 위로 40명 가량의 여성들 사이에 몸을 끼워 넣었다.
사방에는 이 순례길—파리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샤르트르까지 약 60마일—을 벌써 네 번, 다섯 번, 심지어 일곱 번이나 걸었다는 이들이 있었다. 필자는 도저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것이 순례 15시간째, 24마일을 걸은 시점의 필자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순례는 그 종착점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여정이다. 필자와 2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은 우리 자신을 또 다른 차원—모든 가식이 벗겨지는 영적 세계—로 끌어올리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언덕 위, 일종의 거룩한 지점(thin place)—기독교 이전부터 영적 성지로 여겨지던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 4세기부터 이곳에는 교회가 있었으며, 1252년에 완공된 현 고딕 양식의 성당은 그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천 년 동안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의복 일부로 전해지는 성의(Sancta Camisa)를 공경해 왔다.
오늘날의 순례는 매년 성령강림대축일(Pentecost) 주말에 이루어진다. 그 부활은 프랑스 작가 샤를 페기(Charles Péguy)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신앙의 기복으로 볼 때 결코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지만, 아들이 병들었을 때 아들의 회복을 위해 성모님께 샤르트르 순례를 서원했다.
아들이 낫자 그는 그 약속을 지켜 여러 차례 순례를 마쳤고, 1914년 전장에서 생을 마쳤다. 그 이후 그의 제자들과 동료, 그리고 숭배자들이 그 전통을 이어갔다. 1980년대에 전통 가톨릭 단체인 크레티앙테-솔리다리테(Chrétienté-Solidarité)가 라틴어 미사의 보존을 위한 영적 운동의 중심으로 이 순례를 재정립하면서, 참여 인원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오늘날 샤르트르 순례에는 전 세계에서 온, 대다수가 젊은 세대인 수천 명이 모인다. 분위기는 마치 코첼라(Coachella) 축제와 십자군 원정을 절묘하게 섞은 듯하다. 순례자들은 ‘챕터(chapter)’라 불리는 단위로 나뉘며, 프랑스 소년·소녀 스카우트들이 주요 인원을 이룬다.
필자가 속한 챕터는 영어권 여러 나라에서 온 17세에서 40세 사이의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매일 전통 라틴 미사가 봉헌되고, 묵주기도는 라틴어로 낭송된다. 미사 이전의 전례(1962년 이전의 예식)의 위태로운 처지에 대한 강론도 이어진다. 어떤 이들은 전통 전례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어떤 이들은 단순히 육체적 도전을 위해 참여한다. 필자는 단지 모든 여건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필자는 다른 ‘가톨릭 Z세대’들 못지않게 전통과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스스로 전통 라틴 미사에 자주 참석하는 편은 아니다. 필자가 미사에서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사제가 “이것이 하느님의 현존이다”라고 고백하듯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
필자는 노부스 오르도(Novus Ordo 일반 미사) 미사 세대의 가톨릭 신자이지만, 전통 예식이 신앙의 표현으로서 더 온전하다는 주장에는 쉽게 반박하기 어렵다. 사흘 동안 전통 가톨릭의 세계 속에 잠기며 필자는 깨달았다. 자신이 싫어했던 것은 ‘전례 논쟁’이지, 그 전례 자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첫날 밤, 야영의 고된 현실 앞에서 필자는 문득 생각했다. 순례라는 행위 자체가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현대성, 세속주의, 대중적 개신교, 그리고 희석된 가톨릭 신앙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고난을 자청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미신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영혼은 신성한 섭리가 있음을 이해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통을 은혜로 바꾸시는 그 섭리 말이다. 주님은 그 자비 안에서 우리가 당신의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다. 그날 밤, 필자의 매트에는 빗물이 고였고, 스스로 힘없이 “비가 그치게 해달라” 기도했지만, 응답은 이랬다. “불편함은 견디겠지만, 다치지는 않을 것이다.”
성령강림대축일 아침, 붉은 태양과 맑은 하늘이 우리를 맞이했다. 각 챕터는 십자가와 수호성인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 그리고 국기를 들고 행진했다. 우리 챕터의 초록색 깃발에는 금색 십자가와 함께 ‘전통의 수호자’ 성 요셉(St. Joseph, Custos Traditionis)이 그려져 있었다(교황령 Traditionis Custodes와는 다른 의미로). 빗물에 젖었음에도 깃발들은 우리의 영을 북돋았다. 우리는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였다.
둘째 날은 첫날보다 훨씬 수월했다. 한적한 들판 한가운데서 주교 아타나시우스 슈나이더가 주례하는 장엄한 미사가 봉헌되었다. 필자는 시야가 가려 전혀 볼 수 없었지만, 햇살 아래 잠시 쉬며 그 순간의 은총을 만끽했다. 일상에서는 미사만이 유일하게 영적 근육을 쓰는 시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야외 미사는 여정의 끝, 곧 미사 자체가 예표하는 영원한 안식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세 마일 길이의 순례 행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빠르고 일정한 걸음이 필요하다. 간격이 벌어지면 뛰어야 한다. 챕터의 십자가 가까이에 머무는 것이 좋다. 쉴 시간은 거의 없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금세 뒤처질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긴박함 속에서, 필자는 문득 깨닫는다. 우리를 끊임없이 분산시키는 세속적 ‘쾌락’과 ‘필요’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순례는 동반자의 필요를 일깨운다. 동행자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전통주의자들은 종종 ‘특이한 사람들’로 비춰지지만, 필자가 만난 이들은 가톨릭이 낳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헌신적이고, 지적이며, 사교적이다. 어떤 이는 대학원생이고, 어떤 이는 본당의 음악 봉사나 제대 봉사자로 섬기고 있었다. 몇몇 남성들은 사제 성소를 식별 중이었다.
샤르트르 순례의 중심에는 ‘전통 전례의 보호’가 있다. 한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바른 예배는 바른 신앙을 낳고, 바른 신앙은 바른 문화를 세운다.” 하지만 모든 이가 라틴 미사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집 근처에 경건한 노부스 오르도 미사가 있는데 굳이 1시간 반을 운전해 라틴 미사에 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둘째 날 끝자락, 멀리서 성당의 쌍둥이 첨탑이 수평선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성모송(Salve Regina)을 노래하며 감사드린다. 날씨는 맑고, 프랑스 스카우트들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우리를 맞는다. 이제 46마일을 걸었고, 발은 아프지만 마음은 가볍다. 이제 14마일만 남았다. 필자는 이 여정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지막 날, 새 힘이 솟는다. 들판에서 대열이 멈출 때마다 우리는 성가집의 모든 찬미가를 부른다. 전해진 음료를 돌려 마시고, 남자들은 포도주 상자에서 직접 입으로 붓는 ‘기적의 처방’을 자랑하지만, 필자는 사양한다. 길모퉁이를 돌자, 평원 위로 대성당이 솟아오른다. 마치 라틴 미사에서 성체가 들어 올려질 때처럼 전율이 일었다. 성당은 점점 커지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듯 우리를 시험한다. 마침내 샤르트르 교외에 이르고, 언덕을 오른다. 주교가 축복을 내리시자, 우리의 성조기가 눈에 띄었는지 “미국이 평화의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마지막 미사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고행이었다. 성당은 순례자들로 가득 차 대부분은 광장에 머물러야 했다. 자갈 위에 무릎을 꿇고 그늘 하나 없는 곳에서 필자는 이렇게 느꼈다. “이토록 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적은 처음이다.” 그러나 행렬이 깃발을 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 내 영혼이 다시 깨어났다. 오르간이 순례의 전통 성가를 울려 퍼뜨렸다.
“샤르트르가 울린다, 샤르트르가 너를 부른다(Chartres sonne, Chartres t’appelle).”
다음날 아침, 우리 챕터와 몇몇 그룹이 한 번 더 미사를 봉헌했다. 예전에는 이 미사가 성당 지하의 크립트에서 봉헌되었지만, 최근 주교와 라틴 미사 집전 문제로 갈등이 있어 다른 성당을 사용해야 했다. 영성체 후 필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전례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것이다.
미사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마치 바다의 수면처럼 그 밑에 감추인 힘을 암시한다. 우리가 보는 것 이상의 신비가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이성으로 따질 일이 아니라, 그 신비 안에서 ‘쉬는 것’이었다. 동시에 필자는 감사했다. 우리가 이 여정을 완주할 수 있었음을. 사도 바오로의 말이 새로이 살아났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릴 길을 마쳤다”(2티모 4,7).
그러나 필자의 묵상은 곧 끊겼다. 마지막 성가가 시작되자, 한 남성이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쳤다. 마치 악령에 사로잡힌 듯했다. 손이 차가워졌다. 의료진이 달려왔지만, 그의 동행들이 “괜찮다”며 막아섰다. 필자는 라틴어 후렴을 계속 부르며 복되신 성모님께 “우리 집에 오소서(chez nous)”라 청했다. 이런 일이 영적으로 뜨거운 장소에서는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잠시 후, 필자는 무릎으로 성당 계단을 올라가 성모님의 성의(聖衣)에 경배드렸다. 그리고 내 안에 품었던 무거운 짐을 그분께 맡겼다. 이 성당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우리가 인생 전반에 걸쳐 향해야 할 순례의 목적지다. 아마도 필자는 방금 내 인생 여정의 축소판을 완주한 셈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출애굽기를 영적 여정의 청사진으로 여긴다. 죄와 나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시련과 정화를 거쳐 약속의 땅에 들어가듯이, 아브라함에서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조와 예언자의 삶은 그 여정을 되풀이했고, 그 절정은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완성되었다.
이런 순례의 여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하느님께서 가장 가까이 계신 순간에, 우리는 그분께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계명을 받을 때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처럼, 호렙산에서 주님의 현현 직전 낙심한 엘리야처럼 말이다.
필자의 약점 중 하나는 감정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다. 위로를 느끼지 못하면, 하느님이 멀리 계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번 순례는 나에게 가르쳤다. 영적 생활은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순례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인생 여정’을 ‘보이는 형태’로 드러내 준다. 그 목적지와 여정의 도우심을, 지금 여기서 만질 수 있게 해준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