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56] “빅 에바”에게 작별을, “긱 에바”에게 인사를
  • 칼 R. 트루먼 Carl R. Trueman is a professor of biblical and religious studies at Grove City College and a fellow at the 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 His most recent book is Crisis of Confidence. 윤리·공공정책센터 선임연구원

  • 수년 전, 필자는 “빅 에바(Big Eva)”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이 말은 어떤 X세대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성세대의 저명 인사들을 싸잡아 비하할 때 쉽게 사용하는 조롱어가 되었지만, 본래 필자가 의도했던 것은 다소 유머러스하면서도 비판적인 문제 제기였다.

    그것은 대형 복음주의 콘퍼런스의 플랫폼이 급부상하고, 특정 강연자들—필자가 “유명 목회자(celebrity pastors)”라 부른 이들—이 교회 정책과 신앙 형성의 주체로 자리잡으면서, 지역 교회와 목회자, 교단의 역할을 대체하거나 왜곡하는 현상을 가리키기 위함이었다.

    필자가 “유명 목회자”라 부를 때 그것은 단순히 널리 알려진 인사를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공적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기 교회 밖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결과적으로 자기 교회를 약화시키는 이들을 의미했다. 그들은 단순한 팟캐스터나 블로거, 논설 필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교단처럼 기능하려 하지만 교단이 본래 갖춰야 할 책임 구조(accountability)는 회피하는, 대형 초교파(parachurch) 조직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빅 에바”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필자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목회자는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거의 누구도 자기 교회의 실제 목사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복음주의 대형 콘퍼런스의 간판 연사들을 꼽았다. Q.E.D.(증명 끝)

    이제 “빅 에바”의 시대는 거의 막을 내린 듯하다. 미국 복음주의 진영은 더 이상 몇몇 거물급 인물이나 몇 개의 대형 콘퍼런스가 주도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행사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성황을 이루지만, 과거처럼 복음주의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본래 지녀야 했던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즉, 지역 교회 신자들이 자신의 공동체에 헌신하면서도 타 교단의 설교자들을 듣고 교류하기 위한 선택적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이다.

    그러나 “빅 에바”의 근본 문제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새로운 장으로 옮겨갔다. 바로 소셜미디어라는 장(場)으로 말이다.

    오늘날 미국의 경제 질서는 흔히 “긱 경제 (gig economy 비정규직 노동시장)”라고 불린다. 이는 전통적 기업과 제도에 기반한 고용 구조에서 벗어나,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분절적이고 비공식적인 수입원을 확보하는 형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우버(Uber)는 면허 택시를 대체했고, 에어비앤비(Airbnb)는 숙박업의 문을 전문 호텔업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까지 개방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세계에서도 “빅 에바”는 이제 “긱 에바(Gig Eva)”라 부를 만한 새로운 세력에게 도전받고 있다.

    “빅 에바”와 “긱 에바”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빅 에바”의 인물들은 대부분 지역 교회 섬김이나 기존 출판사를 통한 저술로 명성을 얻은 후, 그 기반 위에서 영향력을 확장했다. 그들에게는 “빅 에바” 이전부터 존재하던 일정한 교회적 권위가 있었다. 반면 “긱 에바”에서는, 온라인에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회 사역의 실제 검증 없이도 ‘스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다. 바로 책임의 부재이다. “빅 에바”의 지도자들은 서로에게만 책임을 졌다. “긱 에바”의 후예들은 그마저도 없다. 즉, 둘 다 실제 교회를 주변부로 밀어내고, 자기 플랫폼과 선언을 지혜의 원천으로 만들지만, “긱 에바”는 필자가 “빅 에바”라 명명하게 만든 그 문제를 훨씬 더 극단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현상 모두 자신이 속한 매체의 경제 논리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이다.
    대형 콘퍼런스의 세계에서는 유명 연사가 티켓 판매의 핵심이었다. 그 때문에 “빅 에바”는 종종 분별력을 잃었다. 필자는 한 “빅 에바” 주최자에게 “당신이 내세운 몇몇 간판 연사들이 참된 목자의 모범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아니오”라고 답했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개적인 스캔들로 무너졌고, 그제서야 무대에서 사라졌다.

    “긱 에바”의 경제 구조는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X(옛 트위터) 같은 플랫폼에서 명성을 쌓으려면 끊임없는 선 넘기(transgression)가 필요하다. 그 결과, “긱 에바”의 유명 인사들은 “빅 에바”의 지도자들을 공격하거나 심지어 히틀러를 재해석하려 드는 행태까지 보인다.

    또한 “긱 에바”는 기술 매개 소통의 마찰 없는 특성 덕분에 더욱 파괴적이다. “빅 에바”는 비판자들을 무시하거나 고용주에게 전화해 조용히 입막음할 수 있었다. “긱 에바”는 공개적 인신공격을 퍼붓지만, 실질적 능력 검증이 필요 없는 온라인 익명성 속에서 안전하다.

    실로 X는 영국 『Middlemarch’s Will Ladislaw』의 후손들이 번성하기에 완벽한 공간이다. 그는 “독일 작가들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지만, 타인의 결점을 동정하는 데는 별다른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긱 에바”의 어떤 개인이나 그룹도 “빅 에바” 시대의 거물들처럼 광범위한 영향력을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온라인 담론의 분산성 때문이다. 더 이상 만석의 대형 홀에서 진행되는 콘퍼런스 무대와 같은 중심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긱 에바”는 여전히 오늘날의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에 정밀하게 부합하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의 중요한 부분들을 재편할 가능성이 있다.

    “긱 에바”의 주창자들은 끊임없는 성상파괴(iconoclasm)를 통해 자기 ‘진정성’을 입증하려 들고, 그들의 길을 막는 모든 권위적 구조를 비난하며, 현실의 공동체적 섬김과 책임이라는 값비싼 요구 대신, 육화되지 않은(disembodied) 온라인 교류라는 값싼 대체물을 우선시한다.

    “빅 에바”에도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긱 에바”는 그 문제들을 더욱 극단적으로 확대할 태세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0-24 07:52]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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