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2025년 12월 8일은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당시 필자는 갓 싹튼 십대 소년으로서 그 사건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 후 공의회는 내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많은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필자는 내 학문 인생의 대부분을 공의회의 문헌을 연구하고, 그 의미를 해설하며, 그 위대한 대공의회가 촉발한 논쟁들 속에서 살아왔다.
몇 해 전, 공의회를 주제로 책을 집필하던 중 필자는 그 작업에 대한 더욱 깊은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공의회 문헌을 작성하고 다듬는 임무를 맡았던 신학자들은 지적·영적 차원에서 모두 신앙에 헌신한 사제들과 주교들이었다.
공의회 신학전문가인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신부와 Lumen Gentium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4대 헌장 중 하나인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의 초안을 작성하고 신학위원회를 이끌었던 제라르 필립스(Gérard Philips) 신부의 일기를 읽다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와 복음, 그리고 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쳤음을 금세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필자는 공의회를 공격하며 그것을 ‘근대 세계의 형상에 따라 교회를 재구성하려 한 신학적 혁명가들의 작품’으로 몰아가는 글들을 접할 때마다 당혹감을 느낀다. 물론 일부 인사들은 공의회가 급진적이고 전복적이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스위스의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의 회고록을 보면—젊은 독자들은 그의 이름을 생소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그는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과 특히 필립스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가 로마 교황청에 굴복했다고 비난한다.
큉에 따르면, 교의헌장은 교회의 위계적 구조를 유지함으로써 오류를 범했으며, 바오로 서간 일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등한 형제 공동체’의 비전을 따라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공의회 교의위원회 안에서도, 그리고 전 세계 주교들이 표결한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서도 아무런 영향력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문헌들은 어떠한가? 그들이 가톨릭 전통을 배신했는가?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이나 비그리스도교 관계에 관한 선언 (Nostra Aetate)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부정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약화되는가? 가톨릭교회가 단지 여러 전통 중 하나로 격하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의회의 정신’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은 ‘유비적 사고(or 유추적 analogical thinking)’로의 전환이었다. 이전의 교회가 흔히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오류를 정죄하기보다,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와 타 그리스도교 공동체, 타 종교(특히 유대교), 그리고 세속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유비적 유사성을 강조했다.
1962년 12월 4일, 공의회 개막 초기, 레오 요셉 쇤언스(Leo Joseph Suenens) 추기경은 교황 요한 23세의 사전 검토를 거친 연설에서, 공의회가 가톨릭 신자들과 ‘갈라진 형제들’, 그리고 현대 세계와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제안은 공의회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으며, 공의회는 타 그리스도교 신자들, 타 종교인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가톨릭교회와 ‘형제적이며 유비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천명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공의회의 Sitz im Leben (삶의 자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의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신학자들과 주교들은 거의 모두 유럽인이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향이 폐허가 된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스도교 유럽의 심장부에서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수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 핵 대치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인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정죄’의 언어를 써야 했는가, 아니면 모든 인류의 일치를 강조해야 했는가? 쇤언스는 이미 “가톨릭을 타인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유비적 사고는 가톨릭과 타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유대를 강조할 수 있게 하였다.
공의회 폐막 2년 후, 콩가르는 이렇게 썼다. “공의회의 교의 문헌 저자들은 공통박사 성 토마스가 그들의 사상 구조와 기초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들 자신도 이를 고백할 것이다.”
콩가르는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적·참여적 사고(analogical and participatory thinking)’가 공의회 신학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가리킨다. 다른 교회들, 다른 종교들, 그리고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계시된 진리가 충만히 현존하는 가톨릭 신앙의 ‘참여자(participants)’로서, 형식적·실질적으로 그 진리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의회 폐막 20년 후, 콩가르는 일련의 인터뷰에서 공의회의 핵심 주제들을 다시 다루었다. 그는 공의회가 극복하려 한 신학적 ‘고립들’을 지적했다. 교황이 다른 주교들로부터, 마리아가 다른 성인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상태 말이다. 공의회의 성과 중 하나로 그는, 교황이 주교단의 머리이자 동시에 그 구성원으로서 제자리를 회복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마리아 역시 ‘고립된 존재’로 묘사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으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콩가르는 여기에 덧붙일 수도 있었다. 즉 공의회는 가톨릭 신자들을 다른 그리스도교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현대세계로부터 격리시켰던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도 애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일성을 결코 훼손하지 않으면서, 가능한 모든 차원에서 ‘유비적 친연성(analogical relatedness)’을 강조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는 실로 다양하다. 일치운동, 종교 간 대화, 종교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관계, 성경과 전통, 평신도의 역할 등 수많은 주제를 포괄한다. 공의회 폐막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주요 문헌들은 여전히 명료하고 일관되며, 신학적 정밀성과 사려 깊은 통찰로 가톨릭 신자들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이 위대한 사건을 하느님의 섭리적 손길이 이끈 것으로 돌아볼 수 있으며, 그것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