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화의 한 지표로서 ‘Saturday Night Live’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그들이 희극 대신, 민주당이 승인한 진보적 풍자만을 반복하기로 선택했을 때부터였다. 그러나 가끔 이 장수 프로그램이 아직 신경을 건드릴 때가 있다. 얼마 전 그들이 방영한 짧은 가짜 광고 하나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깊은 진실을 예리하게 비춰주었다.
광고는 젊은 배우들과 게스트 호스트인 코미디언 댄 레비가 카메라를 향해 도발적인 시선을 보내며 시작된다. 재킷을 벗어 던지고 억제된 욕망을 풀어헤치자, 배경에 흐르는 부드러운 음악이 감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심심하신가요?” 한 배우가 묻는다.
“당신의 삶에 약간의 자극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또 다른 이가 속삭인다.
“예전엔 성(性)을 원했죠,” 세 번째 배우가 정돈되지 않은 침대 위에서 몸을 돌리며 말한다.
“하지만 이제 서른 후반이 되었어요...”
“이젠 성(性)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어요.”
“새로운 게 필요해요.”
“뭔가 흥분되는 것!”
“새로운 판타지가 필요해.”
그리고 그 ‘새로운 판타지’가 곧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Zillow’ 미국 최대의 부동산 검색 사이트다. 배우들은 그 화면을 스크롤하며 “업데이트된 콜로니얼 스타일 주택과 성숙한 조경” 같은 말을 감미롭게 속삭인다. 마치 음란물을 감상하듯 말이다.
실은,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농담이 통했던 이유는 명백하다. 월 이용자 2억 2,700만 명을 자랑하는 Zillow는, 오늘날 수많은 미국인에게 즉각적인 만족과 다른 삶을 향한 불순한 몽상의 피난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몽상’일 뿐이다.
애초에 Zillow는 주택을 사고팔거나 임대하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 통계에 따르면 83%의 이용자는 아무런 거래 의도 없이 단순히 구경만 한다. 그들은 좋은 학군의 1.3에이커짜리 목장형 주택, 완성된 지하실, 넓은 뒷마당을 지닌 집을 보며 ‘언젠가 나도 저런 곳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하는 헛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 부동산 집착은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더 넓고 예쁜 집을 원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매일 수 분, 혹은 수 시간을 자신이 감히 살 수도 없는 집 사진 수백 장을 훑는 이 기이한 습관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문제는 좁은 아파트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가 집(房)을 탐하는 이유는, 가정(home)—즉, ‘살 가치가 있는 삶의 터전’—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뉴욕의 유명 부동산 중개인 스콧 해리스는 이런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다. 그는 20여 년간 초고가 부동산을 중개하며, 그 총액이 몇몇 국가의 GDP를 넘을 만큼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렇게 그는 맨해튼 시민들의 ‘더 넓은 공간’을 향한 절박한 열망을 지켜보며, 우리가 부동산이라는 말을 할 때 진정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탐구했다.
그의 통찰은 최근 출간된 책 『The Pursuit of Home』(집을 향한 추구)에 담겨 있다. 이 책은 단순히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이를 위한 실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부동산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평수의 확장’뿐 아니라 ‘영혼의 확장’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성찰하는 영적 묵상서이다.
부동산은 세상에서 가장 ‘구체적인(concrete)’ 산업이다. 주식이나 디지털 상품처럼 실체가 희미한 것이 아니라, 한정된 토지와 건물이라는 물질적 대상에 관한 것이다. 물론 해리스는 이 산업의 현실적 문제들—예를 들어, 미국의 대형 부동산 중 3분의 1이 비어 있는 노년층의 소유이며, 자녀를 둔 젊은 가족들이 점점 줄어드는 주택 공급에 고통받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2023년 기준, 기관 투자자들은 미국의 모든 아파트의 10%, 단독주택의 4분의 1을 사들였다. 그 결과 미국은 공동체에 뿌리내린 ‘자기 집의 국민’에서, 기업의 변덕에 의존하는 세입자의 민족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해리스는 통계로 잡히지 않는 더 깊은 병을 직시한다. 그는 이것을 “Zillow 정신”이라 부른다. “기술이 우리를 해방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묶어 주던 물리적 유대를 더욱 느슨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원격으로 일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전국을 떠돌며, 단기 임대나 소형 주택을 전전한다. 우리는 부동산에 대한 ‘가상적’ 집착에 더 많은 시간을 쓰지만, 그 부동산을 떠받치는 공동체적 토대—즉, 이웃과 지역사회를 이루는 사회적 기둥들—은 반대 방향으로 허물어지고 있다.”
그의 결론은 냉혹하다. 인터넷이 ‘가정(home)’에 대해 저지른 일은, 포르노그래피가 ‘인간의 성적 친밀감’에 저지른 일과 같다. 신뢰와 인내, 인격적 헌신으로 쌓아야 할 신비로운 연합의 여정이, 즉각적 쾌락과 피상적 자극을 좇는 불모의 소비 행위로 변질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동산 중개인의 역할도 달라졌다. 2000년경, 중개인은 ‘토지 상어’—가장 먼저 매물을 잡기 위해 동네를 배회하는 투기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해리스에 따르면 오늘날 진정한 중개인은 라비나 사제에 더 가깝다. 그는 구매자나 세입자의 고백(confessio)을 경청하고, 그들이 잘못된 욕망의 덩굴 속에서 벗어나 참으로 원하는 집, 곧 영혼이 안식할 집을 찾도록 돕는 사목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의 책은 일종의 ‘회심담’으로 가득하다. 처음엔 특정 가격대의 새 아파트를 원하던 이들이, 대화를 거듭하며 그것이 단순한 결혼의 불화나 직장 경쟁에서 비롯된 공허한 욕망임을 깨닫는 사례들이다. 해리스는 ‘좋은 집’이란 단순히 평당 가격이나 설계 지수의 합산이 아니라, 사랑하고, 치유하며, 봉사할 수 있는 인간적·영적 공간임을 일깨운다. 완벽한 집이란, 예산뿐 아니라 신념에 부합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Zillow가 가르친 대로 “더 크고, 더 새롭고, 더 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해리스는 ‘가정(home)’을 짓는 일은 곧 자신이 무엇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는지를 성찰하고, 그것을 공간 안에 구현하는 행위라고 강조한다.
그는 경고한다. 현재 집을 구매한 미국인의 절반만이 만족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후회하고 있다고. ‘가정 짓기(home-making)’는 단순히 행복한 소비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국민을 만든다. 그것은 서로에게 뿌리내린 시민 공동체를 세운다. 그것은 국가를 ‘상품화된 공간’이 아니라 공동의 집(domus communis)으로 되돌린다.
우리의 나라는 클릭 한 번으로 다른 옵션과 비교할 수 있는 일시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흙과 땀, 기억과 사랑으로 얽힌 유일무이한 집이다.
필자는 해리스의 책을 모든 이에게 권한다. 단순히 집을 사고파는 이들뿐 아니라, “다시 위대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영적 독서다. 그는 부동산의 언어로 복음을 다시 말한다.
집은 상품이 아니라, 성화(聖化)의 공간이며,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안식하도록 부름받은 제2의 낙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