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즈위키(Jan Zwicky)는 르네상스적 인물이다. 그녀는 프린스턴과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며, 여러 상을 받은 시인이자 창작문학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고, 고국 캐나다의 실내악단과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시인이자 조판가인 남편 로버트 브링허스트(Robert Bringhurst)와 함께 『죽는 법 배우기 : 기후위기의 시대에 대한 지혜』(Learning to Die: Wisdom in the Age of Climate Crisis)를 출간한 환경사상가이다.
그녀의 경력은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즈위키의 시각에서 이 모든 영역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긴밀히 통합된다. 『서정적 철학』(Lyric Philosophy)에서 그녀는 시와 음악, 은유와 예술이 철학과 과학 못지않게 정밀하고 진지한 사유의 방식임을 주장한다. 그녀는 지난 수세기 동안 “세계의 참된 질서는 체계적이며, 이성적 분석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있다”는 전제를 거슬러 올라간다.
분석철학의 핵심 은유는 ‘명료성(clarity)’이며, 이 명료성은 감정·욕망·아름다움·울림 같은 “혼탁한 구름”을 몰아냄으로써 달성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즈위키는 묻는다. 명료성이란 무엇인가? 어떤 진술이 “유리 저편의 사물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응답하고, 사랑하게 만들 때” 비로소 명료하다고 할 수 있다.
명료성이란 시야를 “정화”하는 것이며, 소설·시·음악 작품이야말로 그것을 실현한다. 문제는 애초에 예술이 어떻게 “사유로서의 지위”로부터 추방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즈위키에 따르면 철학을 철학이게 하는 것은 방법이나 내용이 아니라 “정서적 헌신(affective commitment)”이다. 철학은 스스로의 자기상에 반하여, 본질적으로 어떤 열정에 의해 구동된다. “철학의 에로스는 명료성이다.”
이러한 분석 비판은 하이데거식 난해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나, 즈위키는 반(反)실재론자도, 과학의 적도 아니다. 그녀는 단지 과학을 제자리에 두고자 한다. 과학은 진리를 발견하지만, 과학이 세계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또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철학적이든 과학적이든 분석은 인간 존재 방식의 “하나의 차원, 하나의 축”만을 비춘다. 우리는 종종 대상을 부분으로 해체하는 해부적 분석이 아니라, 전체적 형상—Gestalt 형태—를 즉각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해한다. 이해란 얼굴을 알아보면서도 그 얼굴을 그리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익숙한 선율을 낯선 조성과 서투른 연주 속에서도 즉시 알아듣는 것과 같다.
즈위키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핵심 은유 가운데 하나는 “공명((共鳴 Resonance)”이다. 공명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통합한다. “이것성(Thisness)이란, 어떤 고유한 사물을 경험하는 가운데 그 안을 통해 세계의 공명 구조가 울려나오는 것”이다. “각각의 ‘이것’은 공명의 구조를 고유하게 초점화하지만, 그 구조 자체는 언제나 동일하다. 왜냐하면 세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진술이 다른 진술들을 울려나오게 할 때 그것은 공명한다. 하나의 작품 안에서도 내부적 공명이 있을 수 있다. 즈위키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체에서 “종소리 같은 특질(bell-like quality)”을 발견한다. “각 문장은 완전히 자족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전체 구조를 울려 퍼지게 한다.”
공명은 작품과 작품,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동한다. 공명하는 소설이나 교향곡은 철학적 통찰을 불러일으키고, 철학은 시를 낳으며, 시는 다시 음악으로 변주된다.
공명의 개념은 즈위키의 시에서, 특히 『바흐 연습하기(Practicing Bach)』라는 시집에서 가장 탁월하게 구현된다. 이 시집은 공명에 관한 공명하는 시적 연작이다. 첫 번째 시 「프렐류드」의 첫 구절은 곧장 철학으로 뛰어든다.
피타고라스는 말했다.
별들은 소리를 낸다.
우리의 청각 밖에서 울리는
어떤 음악—사물들의 비례와
공명. 그것은 이론의 쾅쾅거림도,
인간 언어의 바람소리도 아니며,
욕망이나 허기의 밝은 노래도 아니다.
모든 것을 지탱하는
울리지 않은 울림이다.
참으로 아름답다. 세계와 더불어 작곡된 “천구의 음악”, 사물들의 고요하고 조화로운 상호작용이다. 이와 비교하면 이론은 “쾅쾅거릴” 뿐이며, 인간의 언어는 단지 허공의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즈위키는 곧 불협화음을 들려준다.
아내가, 아무 예고 없이, 죽어 있다.
너는 집에 돌아와, 쓰레기 더미에서
생선 머리를 건져내며
그 속에 듀캇(금화)을 발견한다.
우주가 우리를 비웃는가? 아니다.
우주는 말한다.
“즉흥적으로 대처하라.”
어디를 보아도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서리로 덮여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버려진 생선 머리 속의 금화. 이보다 더 불협화적인 대비가 있을까? 매일, 매 순간, 세계는 피타고라스의 조화를 조롱하는 듯하다. 우리가 듣는 것은 조화의 음악이 아니라 잔혹한 우주의 냉소처럼 들린다.
그러나 즈위키는 그 결론을 거부한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세계가 공명한다면, 그 조화 속에는 반드시 죽음이 포함되어야 한다. 사실 아름다움은 “죽음으로 서리 덮여 있다(rimed with death).” “rime”은 서리이면서 동시에 “rhyme(운율)”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죽음으로 서리 덮여 있다면, 그 아름다움은 죽음과 운율을 이루며, 죽음은 아름다움과 운율을 이룬다.
음악이야말로 이 운율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음악은 사라짐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 음은 켜지고, 사라지며, 다음 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음악은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만 존재한다.
죽음의 불협화음은 피타고라스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즉흥적으로 대처하라”고 촉구한다. 시집의 마지막 작품 「지그(Gigue)」에서 즈위키는 그 초대를 이렇게 확장한다.
우리의 근면함 : 열 개의 손가락과
건강한 폐. 끊임없이 연습하라.
예술은 하나다:
열린 공간에서 부는 바람
우리와 함께 슬퍼하고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즉흥적으로 대처하라.”
죽음과 아름다움이 운율을 이루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삶의 충격적인 화음과 예기치 않은 선율들을 따라 변주하도록 부름받는다.
물 흐름의 소리를 듣고, “죽음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가까워 보여도” 여전히 빛나는 빛을 바라보며, 우리는 공명(resonance)에 우리의 신앙을 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