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60] 현대성과 하느님 담론 ①
  • 한스 부어스마 Hans Boersma is the Saint Benedict Servants of Christ Professor in Ascetical Theology at Nashotah House Theological Seminary.– Nashotah House 신학교 석좌 교수

  • 현대 세계의 가장 큰 유혹은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etsi Deus non daretur) 살아가는 것이다. 헨리 드 뤼바크(Henri de Lubac)는, 제2차 세계대전 전 프랑스 가톨릭 사회에서 파시즘이 정신과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를, 사람들이 이미 etsi Deus non daretur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필립 셰러드(Philip Sherrard)는 근대 과학적 사고방식이 ‘인간과 자연의 유린(The Rape of Man and Nature)’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곧 교만하게도 하느님을 배제한 인간 중심적 존재 방식의 결과였다.

    최근 폴 킹스노스의 저서 『기계에 맞서서(Against the Machine: On the Unmaking of Humanity)』의 제목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세속적 근대성은 인간이 자신에게만 책임을 진다고 전제한다. ‘위층의 하느님’을 퇴출하려는 충동은 현대 서구 정신의 깊은 층위에 새겨져 있다.

    현대인이 etsi Deus non daretur 방식으로 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술적 요인으로 근대 시대에 가속화된 ‘자연에 대한 지배’의 확장은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문화적 요인인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이상은 종교적 권위를 벗어나는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는 신학적 원인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신학이 자신을 소멸시킨 이유이다. 그 중 핵심적 요인 하나는 하느님의 단순성(simplicity of God), 혹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서방의 신학 전통은 하느님을 너무 멀고 닿을 수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예배하는 행위가 현실의 삶과 불협화음을 일으키게 되었다. 우리는 교리를 인정하지만, 하느님과의 인격적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경험적 신앙은 부재하다.

    필자는 먼저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나는 하느님이 단순하시다는 것을 믿는다.’ 성경 계시에 충실한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을 ‘다양한 부분의 총합’으로 이해하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 부분으로 이루어진 신(神)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교적 신화(pantheon)의 신들과 다를 바 없으며,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의 우상과 유사하다.

    이러한 신들은 인간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그들의 숭배자들은 그 신들을 ‘붙잡고’, 자신들의 현실 이해 속에 포섭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신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처럼 힘과 약점, 모험을 지닌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보다 훨씬 강대한 존재였을지 모르나, 결국 피조물적 존재에 머물렀다. 그들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초월성(transcendence)이 결여되어 있었고, 인간의 이해와 시야 안에 갇혀 있었다.

    하느님이 단순하시다는 고백은 곧 그분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묘사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부분들’을 지니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느님을 “이런 부분과 저런 부분이 섞인 분”이라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하느님을 “존경할 만한 모든 속성과 능력의 총합”이라 정의할 수도 없다. 하느님은 참으로 그러한 모든 완전한 속성이시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초월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단순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얼굴을 직접 바라볼 수 없게 한다. 성경은 말한다. “너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사람이 나를 보고는 살 수 없느니라.” (출애 33,20)

    하느님의 단순성을 고백한다는 것은 곧 그분의 ‘타자성(otherness)’, 즉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의 거룩한 초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문제는 바로 이 단순성 개념과 깊이 얽혀 있다. 물론 필자는 단순성과 초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단순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하느님을 단순하고 초월적인 분으로만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분이 인간과 접촉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초월은 있으되 내재(immanence)가 없는 상태.

    만일 하느님이 ‘순수하게 단순한 분’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분을 보고 알 수 있는가? 그런 개념 아래에서 기도가 과연 의미가 있는가? 순전히 단순한 하느님이라면 언제나 영원히 멀리 떨어진 분으로 남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굽히시어 형상과 모양과 다양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초월과 내재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단순성을 잘못 이해하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을 세우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자들”로 유혹할 수 있다. 앤드루 라데-갤위츠는 그의 저서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 니사의 그레고리오, 그리고 신적 단순성의 변형』에서, 이 신학적 문제의 핵심을 ‘정체성 논제(identity thesis)’라고 명명한다.

    이 논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 “하느님의 모든 속성들은 서로 동일하며, 또한 하느님의 본질(essence)과 동일하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하느님 안에서 ‘지혜’, ‘정의’, ‘자비’ 등의 다양한 속성들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인식적 관점에 불과하며, 하느님 자신 안에서는 이 모든 속성들이 하나로 일치한다. 따라서 정체성 논제에 따르면, 하느님의 속성들은 서로 동일하고, 동시에 하느님의 본질과 동일하다. 곧 “하느님은 그분의 지혜이며, 그분의 정의이며, 그분의 자비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논제를 통해 신적 단순성(divine simplicity)을 이해하였고, 대부분의 서방 신학자들 — 특히 성 토마스 아퀴나스 — 또한 그의 관점을 계승하였다.

    이 논제의 결론은, 하느님의 단순성과 피조 세계의 다양성 사이에 메워지기 힘든 간극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정체성 논제는 절대적으로 단순한 하느님을 다양한 피조 세계(multiplicity of creation)로부터 분리한다. 이 분리는 한편으로는 신학적 이익을 가져다준다.

    *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혼동하지 않게 된다.
    * 우리는 우상숭배(idolatry)나 범신론(pantheism)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가가 너무 크다. 현대적 실재관(realism)은 일상 세계로부터 하느님을 배제하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etsi Deus non daretur, 즉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서방적 관점은 종말론적 시야, 곧 지복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의 이해에서도 문제를 낳는다. 지복직관은 하느님을 직접 보는 최종적 행복의 상태를 의미한다. 아퀴나스는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내세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essentia Dei)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곧, 피조물이 창조주의 본질을 어느 정도 ‘파악(comprehendere)’할 수 있다는 뜻처럼 들린다. 물론 아퀴나스는 라틴어 attingere(닿다, 도달하다)를 사용하여, 우리가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한다’기보다는 ‘그분께 도달한다’는 의미로 제한하려 했다(ST I, q.12, a.7).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지금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는 하느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내세에서는 그 간극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질문한다. “과연 아퀴나스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온전히 유지했는가?”

    아퀴나스를 너무 가혹하게 평가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히, 우리가 하느님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은 “창조된 습관(habitus creatus)”, 즉 “영광의 빛(lumen gloriae)”을 통해서라고 설명했다.
    이 빛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피조물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된 창조된 빛이다. 그는 이 개념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참여하면서도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유지하려 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서방 신학자들(아퀴나스)은 하느님과 인간의 구별을 유지하면서 ‘지복직관’을 설명하려 했고, 동방 신학자들(바실리오, 마시무스, 그레고리오 등)은 본질(οὐσία)과 작용(ἐνέργεια)을 구분하여 ‘신화(神化, theosis)’의 신비를 설명했다.

    결국 두 전통 모두 동일한 목표,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인간의 신적 참여(divinizing union)를 향했지만, 접근 방식과 개념적 도구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천사의 박사(Doctor Angelicus) 아퀴나스가 여전히 한계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가 제시한 “도달(attaining)”과 “이해(comprehending)”의 구별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불분명하다. 정체성 논제에 따르면, 하느님의 본질과 속성은 완전히 동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단순한 본질 전체를 파악하거나, 전혀 파악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국에서 남쪽으로 여행해 멕시코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나라 전체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느님의 본질은 공간적 개념이 아니므로, 이런 비유는 통하지 않는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0-28 08:27]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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