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61] 현대성과 하느님 담론 ②
  • 한스 부어스마 Hans Boersma is the Saint Benedict Servants of Christ Professor in Ascetical Theology at Nashotah House Theological Seminary.– Nashotah House 신학교 석좌 교수

  • 아퀴나스의 신학이 직면한 두 번째 문제는, 정체성 논제(identity thesis)가 그의 ‘지복직관’ 신학을 비(非)그리스도론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의 관점에서 우리가 내세에서 보게 될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essentia Dei) 그 자체이다.

    물론 아퀴나스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퀴나스에게 지복직관의 대상은 성자의 인격적 현현이 아니라, 분할되지 않은 하느님의 본질이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위격들과 신적 본질 사이의 분리를 암시하며, 지나치게 엄격한 유일신론이 신앙고백의 삼위일체 신앙을 압도할 위험을 낳는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우리는 ‘단순성’을 “본질과 속성의 동일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신, 그것을 ‘정도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정체성 논제는 하느님을 절대적 단순성과 초월성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우리의 다원적 현실세계와 단절된 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만일 존재의 위계 속에서 단순성을 ‘정도의 차이’로 이해한다면, 모든 존재는 그 용량에 따라 하느님의 단순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천사는 물총새보다 더 놀랍게 하느님의 단순성에 참여하지만,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단순성에 참여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단순성 안에서 제 자리를 갖게 되며, ‘하느님 안의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단순성을 이해하기 위해 ‘위계적 구조’의 개념을 회복해야 한다. 3세기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는, 존재의 위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엔네아드(Enneads)』에서 그는 “하나(The One)”를 완전히 단순하며(alous), 위계의 각 단계로부터 초연한 존재*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가 지성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며 현존한다고 말한다. 즉, 플로티노스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인정한 것이다.

    플라톤이 ‘형상(Form)’의 세계를 통해 완전한 진리와 아름다움의 ‘참된 본형’을 말했듯, 플로티노스는 그 위에 존재의 위계적 확장 구조를 더한 셈이다. 이로써 그는, 완전하고 단순한 ‘선(agathon)’이 어떻게 불완전하고 복합적인 사물들 속에 현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하나(The One)”는 “존재(ousia)” 너머에 있는 것으로, 인간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의 초월성은 완전하며, 긍정적 신학도, 부정적 신학도 그분을 포착할 수 없다. 이 점에서 플로티노스는 서방의 정체성 논제와 마찬가지로, 단순성과 다원성 사이의 간극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여” 개념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는 전적으로 단순하고 초월적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외적 작용을 통해 각 위계에 자신을 온전히 현존하게 한다.” 플로티노스는 이를 ‘이중 작용의 교리’로 설명했다. 이로써 플로티노스는, 존재의 각 단계가 아래의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그 안에 현존하는 구조를 제시했다.

    동방 신학은 일반적으로 플로티노스의 이 위계적 체계를 신학적으로 수용하였다. 이 전통 안에서 하느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 단순성으로서 접근 불가능한 영역에 머문다. 그러나 피조물들은 각자의 수준에 따라 하느님의 존재(being), 생명(life), 지혜(sophia)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참여의 매개를 동방 교부들은 ‘신적 작용(divinae energiae)’이라 불렀다.

    이 구별은 하느님을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작용(energeia) 역시 하느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에서 ‘하나(The One)’가 ‘지성’을 통하여 자신을 현존시키는 것처럼, 하느님도 자신의 ‘작용’을 통해 피조물에게 현존하신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본질–작용의 구별’은 생소하거나 불편한 개념처럼 들린다. 이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하느님께는 두 부분이 존재하는가? 하나는 본질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 자체가 이미 정체성 논제 — 즉 ‘단순성은 본질과 속성의 동일성’이라는 서방의 전제 — 를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별은 ‘하느님을 나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존재론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플로티노스의 이중 작용이 의심스럽게 들릴지라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떠올려보면 납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동시에 ‘하나이시며 셋’이시다. 그러므로 본질과 작용의 구별 역시, 하느님의 ‘단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필자는 오랫동안 “하느님의 초월성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씨름해왔다. 나의 저서 『하느님을 보다: 그리스도교 전통 속의 지복직관(Seeing God: The Beatific Vision in Christian Tradition, 2018)』에서 필자는, 이 문제를 다루면서도 ‘본질–작용 구별’에는 기대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동방 신학이 시도하는 방향에 공감했지만, 이 구별이 하느님의 단순성을 해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동방의 스킬라(essence–energies distinction)와 서방의 카브디스(identity thesis) 사이를 항해하며, 제3의 길을 제안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본질이다.” 곧, 지복직관은 그리스도의 현현안에서 이루어진다는 해석이었다. 예수께서 “나를 본 이는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고 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본질을 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제 필자는 그 해석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방과 서방의 견해 사이를 절충하려는 시도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본질–작용의 구별’을 수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본질’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사적 실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근원적 성사(Ursakrament)’, 즉 모든 성사적 현실의 근원이시다. 성사는 그가 지시하는 바를 현실로 만들며, 그 가리키는 신비를 지금-여기서 실현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느님이시지만, 그분을 본다고 해서 하느님의 본질을 본다는 것은 아니다.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지만, 하느님의 본질은 여전히 무한히 초월적이다.

    성 막시무스 신학자(Maximus Confessor)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이 탄생하심으로 인해 우리가 그분을 더 잘 알게 된 만큼, 바로 그 탄생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불가해한 분이신지를 더욱 알게 된다.” (Ambigua, 5.5)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본질과 동일시하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를 역사적 예수의 관찰 가능한 차원으로 축소시킬 위험을 낳는다. 본질(essentia)은 점진적이거나 부분적으로 ‘참여’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단 하나이며, 완전하며, 더하거나 덜할 수 없는 것이다.

    본질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절대적이며, “더하거나 덜할 수 있는 정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필자는 한때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본질로 동일시하면서, “우리는 그분의 겸손이나 덕에 더 깊이 참여할 수도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는 본질 개념의 본래적 의미를 왜곡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본질은 사물의 기초로서, 우연적 속성을 제거하고 남는 핵심이다. 플로티노스에게도 “하나(The One)”의 본질은, 그 아래 단계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초월적 실체였다. 따라서 “우리가 본질 안으로 더 깊이 나아간다”는 말은 철학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피조물이 하느님께 점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본질이 아니라 작용을 통하여 그분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활동적으로 현존하심으로써만 우리는 그분 안에 참여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본질을 본다거나 보지 않는다는 두 가지 상태만 있을 뿐이다. 그 사이의 ‘조금 더 본다’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계시를 더 풍부히 이해하며, 제자로서 성장한다고 말한다. 이때 사용하는 “점진적 성장”의 언어는 ‘본질’이 아니라 ‘작용’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워진다”거나 “거룩함에서 자란다”는 말은, 하느님의 본질에 더 참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신적 작용에 더 깊이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해 없이는, ‘성화’와 ‘참여’라는 개념은 신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 구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신학 체계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왜냐하면 본질과 작용의 구별은 동서 교회의 거의 모든 차이의 뿌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참여’의 언어 사용을 주저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피조물이 존재 그 자체인 하느님 안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것을 피했다. 그렇게 말하면 곧 하느님의 본질에 참여한다는 뜻이 되어,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 무너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피조물의 ‘공통 존재’에는 참여를 인정했지만, 하느님 자신에게는 참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서방 신학의 ‘단순성 이해’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참여적 연관성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정체성 논제에 기반한 절대적 신적 단순성은 결국, 하느님과 우주를 완전히 분리하는 관념을 낳았다. 이것이 바로 근대성의 신학적 전조였다. 오늘날 우리가 ‘세속적’이라 불릴 만큼 현대화된 이유는, 우리가 창조를 생각할 때 하느님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교부 시대의 신학자들, 이레네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오, 아레오파기타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성 막시무스는 창조를 단순히 무(無)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나왔다고 보았다.

    디오니시우스는 피조물을 “하느님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투사’된 것”이라 불렀고, 막시무스는 로고스께서 창조 안에서 자신을 “두텁게 하시며, 확장하시며, 구현하신다”고 말했다. 이 표현들은 모두 “절대적으로 단순한 하느님이 동시에 창조 안에 현존한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이런 언어가 현대의 서방 신학자들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그 이유는 대부분 범신론(pantheismus)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실제로 중세 이후 서방 신학은, 자연과 초자연, 창조와 은총 사이의 구별을 점점 더 강하게 설정했다. 그 결과 하느님은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진 ‘순수한 단순성’이 되었고, 세상은 하느님이 부재한 자율적 체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좋은 신학의 조언자가 아니다. 동방 교부들 중 그 누구도 범신론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본질과 작용을 구별함으로써, 하느님의 본질은 완전히 초월적이지만, 그분의 작용은 창조 안에 현존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panentheismus)’, 곧 “모든 것 안에 계시되되,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오늘날 서방의 위험은 범신론이 아니라 실천적 무신론(ateismus practicus)이다. 크레이그 게이는 『현대 세계의 길(The Way of the Modern World, 1998)』에서 이를 정확히 진단했다. 우리가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세속화된 세계’, 곧 신적 임재의 감각이 제거된 현실 속에 살기 때문이다.

    정체성 논제의 단순성은, 속성과 본질이 동일한 순수한 하느님을 우리의 일상에서 제거해버렸다. 그 결과 “일상은 그저 일상일 뿐”이 되었고,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목표를 추구할 때 하느님과 무관하게 행동하는 습관이 형성되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동방 교회의 신적 작용에의 참여 개념이다. 이 개념은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의 비전을 되살린다. 하느님은 자신을 창조적 방식으로 현시하시며, 피조물 안에 몸소 현존하신다.

    따라서 창조는 단순히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의 작용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고, 참여케 하신 결과물이다. 이 참여적 세계관 속에서, “하느님 안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

    이것이야말로 세속화된 세계를 다시 성화시키는 신학적 언어이며,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삶(etsi Deus non daretur)”을 가장 근본적으로 반박하는 길이다. <끝>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0-29 07:31]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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