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 시대의 신앙과 제자직(弟子職)에는 영웅적 차원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타나시우스 성인은 그의 저서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에서 고전적 영웅상(英雄像)의 이미지를 풍부하게 차용하였다.
불굴의 용사 아킬레우스처럼, 성 안토니오는 영적 전장에서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속 영웅 아이네아스처럼, 그는 이집트 사막 한가운데서 수도승들의 참된 대도시를 세웠다. 그는 이교 철학자들과의 논쟁에서도 소크라테스에 견줄만한 변증적 통찰을 드러내며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는 옛 성인전(聖人傳)을 읽으며, 세대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상상력을 불타오르게 했음을 본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적 영웅”이라는 개념은 의심스럽게 여겨진다. 니체에 따르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영웅주의의 가능성을 파괴하였다. 그는 성경적 종교가 ‘도덕의 노예 반란’을 일으켜, 온유하고 평범한 자들을 높였다고 비판했다. 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생명 부정적 약함과 복종을 찬양하며, 생명 긍정적 힘·자기 주장·위업(偉業)을 악으로 규정한다.
겉으로 보기엔 그의 주장이 일견 그럴듯하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 은 자기 전적 헌신의 이상을 드러낸다. 세례자 요한도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성 안토니오의 영웅적 행위를 기록하면서도, 그것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는 그가 한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안토니오를 통하여 당신의 선하심을 실현하신 것임이 분명하다.”
아킬레우스와 아브라함을 비교해 보라. 날쌘 발의 그리스 전사는 자신의 행동으로 전장을 지배하는 인물이다. 반면, 사막의 유목민 아브라함은 신뢰와 순종의 전형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마저 제물로 바치려는 믿음의 순종을 보여준다. 니체는 “진정한 영웅은 자신을 드높인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정반대를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자아를 버리고, 주님을 위해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을 받아들이라고 부름받는다.
그러나 겉모습은 언제나 속일 수 있다. 영웅적 행위와 헌신적 순종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성은 사랑과 헌신의 영(靈)에서 비롯된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영웅주의와 순종의 대립은 은총과 자유의지의 거짓된 대립을 반복하는 오류이다.)
이제 다시 아킬레우스를 보자. 일리아스의 극적 전환은 그의 ‘상처받은 명예’에서 시작된다. 그는 분노하여 전장을 떠난다. 아가멤논이 막대한 보상과 명예를 약속하지만, 그 어떤 자기이익의 호소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 오직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만이 그의 영혼을 다시 불붙게 하여 영웅적 행위로 이끈다. 아킬레우스는 권력이나 지배를 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랑하는 벗의 죽음을 복수하려 했다. 이처럼 사랑의 요구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필자는 복수를 찬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연적 사랑은 정화되어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렇다. 니체의 주장과 달리, 힘과 탁월함은 자기 안에서 자생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고결함은 도토리에서 참나무가 자라나듯 자연 발생하는 잠재력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롤랑의 노래’에서 롤랑은 “나는 위대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싸운 것이 아니다. 그는 용맹히 싸우다 전사했지만, 영웅이 되려 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충실한 종’이었기 때문에 영웅이 되었다.
물론 세상에는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움직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 욕망이 인간의 최고 동기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킬레우스는 전장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며, 세속적 투기꾼들이 역사의 위대한 창건자로 남았을 것이다. 사랑이 결여된 야망과 재능은 무력하다. 영웅성은 초월을 필요로 하며, 그 초월의 동력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섬김’을 원하기 때문이다.
중세 전통에서 편력기사(knight errant)는 영웅의 전형이다. 그는 안락한 동료 집단을 떠나 위험을 감수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과시나 명성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어떤 시에서는 귀부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싸우며, 또 다른 시에서는 성배(Grail)와 같은 초월적 목표를 찾아 나선다.
세르반테스는 기사 문학을 풍자하면서도 “진정한 기사는 반드시 한 여인을 섬겨야 한다”고 돈키호테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의 모험담은 우스꽝스럽지만, 그 말은 옳다. 영웅은 사랑해야 한다. 그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추구하며, 봉사해야 한다.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보존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이야말로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이성을 넘어서는 힘을 부여한다. 그리고 사랑의 열정이 클수록, 우리는 더욱 극단적인 희생을 기꺼이 감행하게 된다.
‘위업’(achievement)이라는 말은 라틴어 ‘ad caput’—즉 ‘정점에 이르게 함’—에서 유래하였다. 가장 위대한 성취는 멀고 험하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희생이 너무 크다고 느껴질 순간에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무모하며, 이성적 계산을 초월한다. 사랑은 자기 중심의 계산을 불태워 버린다. 사랑은 우리를 인간적 한계의 끝까지 밀어붙인다.
사랑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는 실패의 가능성을 끌어안는다. 많은 문학 속 영웅들이 비극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높은 지향’을 보며 경외를 느낀다. 이는 테니슨의 유명한 시구 ― “사랑하고 잃은 것이 사랑하지 않은 것보다 낫다” ― 의 더 깊은 의미다.
그러므로 다시 성 안토니오와 그리스도교적 영웅성으로 돌아가자. 하느님 사랑보다 더 야심찬 사랑이 어디 있는가? 성덕(聖德)을 향한 지향보다 더 높은 목표가 있는가? 그리스도교는 결코 위대함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적 삶을 격려한다.
니체는 근대 서구문화가 생명 긍정적 영웅주의를 잃었다고 염려했으며, 그 점에서는 옳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는 점점 더 얇아지고, 더 착해지고, 더 신중해지고, 더 편안해지고, 더 평범해지고, 더 무관심해질 것이다.” 필자 역시 그 의심을 공유한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 문화를 이렇게 얇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초월의 지평을 지워버렸는가? 인간을 단지 ‘효용 극대화하는 동물’로 여기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수도자들이 고행과 끊임없는 기도 속에 살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삶이 신중한 자기보호, 위험 회피, 안락 추구로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톨릭 전례 속에서 우리는 순교자들의 호칭기도를 바친다. 로마 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찢겨 죽은 성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는 ‘안전’을 경멸한 영웅적 증언자들이다. 현대의 비판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너무 극단적이고 무책임하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비이성적이고, 순결의 윤리는 비현실적이며, 무차별적 자선은 비실용적이라 여긴다.
우리는 ‘작은 인간들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 교육은 ‘비판적 안전주의’를 가르친다. 학생들은 “너무 깊이, 너무 뜨겁게 믿지 말라”고 배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가 거부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위험하고 권위적이며,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니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무관심’이었다. “너의 진리와 나의 진리가 다르다”는 상대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아무것도 희생할 가치가 없다면, 아무도 희생하지 않는다. 이런 회의적 태도는 ‘조용한 자기만족’을 낳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무관심의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불굴의 확신’을 불편해한다. “역사의 옳은 편에 서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도, 그 단호함을 두려워한다.
필자는 니체가 현대인의 무기력한 삶을 통찰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반(反)그리스도교적 증오가,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게 했다. 사랑―특히 하느님에 대한 초자연적 사랑―의 적들이 바로 영웅주의의 적들이다. 더구나 니체의 “권력 의지”는 사랑의 가장 강력한 적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문장은 경멸로부터 에너지를 얻었지만, 그것은 사랑의 대체물이자, 영혼을 소모시키는 냉소였다. 진실로 말하자면, 니체는 ‘마지막 인간(the Last Man)’의 아버지들 중 하나였다.
최근의 한 경험으로 마무리하자. 필자는 한 도미니코회 수도자와 함께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흰 수도복(habit)을 입고 있었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거리에는 오히려 그보다 훨씬 기이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흰 수도복은 즉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표현이 아니라, 한 존재 전체를 건 서약과 헌신, 즉 ‘영적 영웅주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교가 거짓이라 믿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인간 안에 ‘영웅적 열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