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비(Gabby)”는 약 70여 년 전 그녀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녀는 미네소타 평원에서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가곤 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미사 중 그녀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 그녀를 알아왔다. 최근 나는 양로원으로 갔다. ‘그녀를 돌보러 간다’. 즉, ‘그녀가 숨을 거둔 뒤 그 시신을 인도하러 간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내가 알고 사랑하던 이의 유한한 육신을 다루는 일은 일종의 특권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그러나 창백해지고 입이 벌어진 얼굴일지라도, 나와 내 가족을 향해 한때 따뜻하게 미소 지었던 그 얼굴을 알아본다는 것은, 이제는 보기 어려운 인간다움을 다시금 드러내 준다.
육신과 영혼이 이제 분리된 그녀의 손.. 늘 생생하게 대화를 나누던 그 손은 이제 가만히 멈춰 있고, 내 말을 들을 때 반짝이던 눈은 빛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비는 여전히 뚜렷이 보인다.
나는 밤중의 ‘사망 호출(death call)’을 위해 운전하는 은색 미니밴에 화장용 용기를 싣고 양로원으로 간다. 우리가 우드사이드 빌리지를 떠날 때, 개비는 시신 운구용 들것에 놓인 주머니 안에 들어 있고, 나는 그녀를 상자 옆자리에 태운다. 다음 목적지는 화장장이다.
새벽 1시에 도착한다. 나는 대형 셔터의 비밀번호를 눌러 화장장의 가장 큰 자산, 즉 수천 도의 열로 인간의 몸을 불살라 뼈와 재만 남기는 거대한 화로가 있는 공간을 연다. 살과 힘줄은 대기 중으로 사라지며, 순수한 에너지이자 온실가스로 변한다.
화장이 ‘매장보다 더 쉽다’고 흔히 말하지만, 사실 두 방식 모두 우리를 공허한 공간 — 화로이든, 무덤이든 — 에 육신을 내어맡기게 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 공통점을 느낀다. 땅에 묻히면 우리는 부패하고, 우리의 뼈와 살은 흙과 하나가 된다. 화장되면, 우리의 몸은 공중에 봉헌된다. 화장을 택한다고 해서 죽음의 실재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수천 번의 장례미사를 지켜본 나로서는, 시신이 없는 장례미사는 결코 같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사랑하고, 꿈꾸고, 자녀를 안고,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은 모두 ‘몸’을 통해서이다. 우리 몸은 중요한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화장을 허용하지만, 권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개비처럼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화장을 선택한다.
나는 개비를 커다란 신발상자 같은 판지 화장관에 옮겨 담으며 생각한다. 그녀를 통해 여전히 드러나는 진리들이 있다고. 어릴 적 우리는 가장 소중한 보물들을 신발상자에 넣어 두곤 했다. 내 아들 중 한 명도 개비의 상자보다 작은 상자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는 내 눈에는 쓰레기처럼 보이지만, 아이는 의미를 부여한 물건들이 들어 있다.
병뚜껑, 예쁜 돌멩이 몇 개, 새의 두개골 하나. 개비도 어떤 면에서는 이와 같다. 그녀는 금속으로 된 인공고관절,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어 주던 석회화된 치아, 그리고 재치와 날카로운 혀를 품었던 두개골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녀의 시신을 그렇게 보지 않겠지만, 그녀는 분명 보물이다.
나는 그녀를 다음날 아침 화장할 상자 안에 조심스레 눕힌다. 그녀의 손을 복부 위에, 왼손 위에 오른손을 얹어 포개고, 그녀가 임종한 침대 시트로 그녀를 덮는다. 병원 가운만 걸친 그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존엄이다.
나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덮지 않은 채, 시신 접수 서류를 작성한다. 뚜껑을 덮기 전에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등록부에 그녀의 본명을 적으며 미소 짓는다. “개비(Gabby)”는 공식적이지 않아 적을 수 없지만, 사실 그 이름이야말로 그녀의 진실에 더 가깝다. 서명과 장의사 면허번호를 기입하고, 스테인리스로 된 작은 디스크에서 다섯 자리 숫자 — 13335 — 를 적는다. 이 디스크는 화장 후 남는 유골을 식별하기 위한 표시로, 상자 안에 함께 들어갈 것이다.
그 디스크를 들고 개비에게 다가갈 때,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시신을 온전한 상태로 매장한다. 이는 육신에 대한 존경이자,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신 사흘을 본받기 위함이다. 화장은 새로운 관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옛 이교도의 화형 풍습이 다시 포장된 것에 불과하다.
흥미롭게도, 고대의 많은 이교도들은 마지막 길에 ‘동전’을 지니고 갔다. 입속에는 한 닢의 오볼(Obol), 혹은 양쪽 눈 위에는 두 닢의 데나리온. 그것이 행운의 부적이었든, 스틱스(Styx) 강을 건너는 뱃사공에게 건넬 삯이었든, 그 동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잊고 사는 상징이 담겨 있었다. 죽음을 외면하고, 내세를 소홀히 하는 시대의 우리에게는 사라진 상징 말이다.
그 디스크가 그 상징을 되살릴 수 있을까? 다섯 자리 숫자는 단지 숫자일 뿐이다. 어쩌면, 화장을 택한 이들의 손에 넣어 줄 ‘성인 메달’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성 라우렌시오, 성녀 잔 다르크, 혹은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같은 이들이 떠오른다. 혹은 성모님의 발현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비는 이미 자신의 스카풀라를 착용하고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나는 말없이 “잘 가요”라는 작별 인사를 속으로 건네며 그녀의 얼굴을 덮고, 디스크를 상자의 발끝 쪽에 넣는다.
화장이 끝난 뒤, 뼈가 재로 갈리기 전, 그 ‘동전’은 다시 확인될 것이다. 그리고 유골이 자루에 담겨 내게 돌아올 때, 그 동전은 함께 부착될 것이다. 나는 번호를 확인하고, ‘13335’라는 숫자가 개비라는 보물의 가치를 표현하기엔 얼마나 불충분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