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70] 교회의 이민 담론이 실패하는 지점
  • 존 M. 그론델스키 John M. Grondelski is former associate dean of the School of Theology at Seton Hall University, South Orange, New Jersey, and a retired foreign service officer. All views are his own. 신학대학 전 부학장, 전직 외교관

  • 가톨릭의 이민 논의는 종종 핵심적인 사실들을 생략한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주민’의 법적 지위이다.

    필자는 교황 레오 14세의 교서 ‘Dilexi Te’에서 이 기묘한 무시를 비판한 바 있다. 그 문헌은 “이주민들”을 논하면서도 그들의 법적 지위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후 교황 레오 14세는 국가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피난처를 제공해야 할 의무”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균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교회가 이민 위기를 다루는 국가들을 항상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하지 않았다. 시카고의 블레이즈 수피치 추기경이 최근 공개한 “교회는 이주민들과 함께한다”는 영상 또한 합법성의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정직한 논의라면 법적 지위의 문제를 우회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대규모 이민 문제에 대해 성실한 대화 당사자인지 묻기 시작하고 있다. 합법적 거주와 불법적 거주의 구분을 흐리는 것은 단순한 교회적 실수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비평가들이 이미 교회가 이 문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해왔다고 지적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때로는 형식적으로 이민에 대한 국가 주권을 인정하지만, 실제 언어—이를테면 “서류 미비자(undocumented)”라는 표현—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암시한다. 그 결과 교회가 불법 신분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이는 공익의 문제를 다루는 정직한 중재자라기보다 특정한 의제를 밀어붙이는 로비스트의 자세에 가깝다.

    교회는 불법 이민 문제를 “인간의 존엄(human dignity)”의 관점에서 조명하려 한다. 이는 논의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개념이다. 그러나 교회의 선택적 접근은 불법 이민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 자체를 침해하는지를 다루지 않는다.

    자유의지는 인간 존엄의 본질적 측면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양도될 수 없는 존재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의지할 수 없으며, 나로 하여금 어떤 것을 ‘원하게’ 만들 수도 없다. 나는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압박당할 수 있으며, 심지어 물리적으로 강제될 수도 있지만, ‘의지하도록’ 만들어질 수는 없다. 심지어 하느님조차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간섭하지 않으신다. 결국 그분은 우리가 선택한 것을 존중하신다. 설령 그 선택이 스스로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의지’는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적 주권 또한 의지의 행위다. 그것은 공동체가 자신들의 대표를 통해 내리는 결정이다. 가톨릭 사상에서 주권적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공동선을 돌보는 자는—개별적 이해관계로 눈이 가려진 개인들이 보지 못할 수도 있는—공동선의 객관적 조망을 가지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분배적 정의는 공동체의 책임자에게 속하는 것이지, 개인 구성원 각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정치 구조에서 주권적 의지는 민주적 다수의 선택을 통해, 그리고 법치(rule of law)가 정한 절차에 따라 표현된다. 우리의 헌정 질서에서 이는 정당한 입법 절차를 거친 법률 제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법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는 추정의 권리(praesumptio boni communis)를 가진다.

    그러므로 입법 절차 밖의 당사자들이 그 법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합법적으로 제정된 법을 존중해야 하는 깊은 도덕적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조직된 정치 공동체가 특정 사안에 대해 표현한 올바른 의지—즉 인간 존엄의 본질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1965년 제정된 미국의 이민 및 국적법은 그러한 요건을 충족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표현된다고 인정한다면, 그리고 공동선의 책임자들이 공동선을 위해 내린 집단적 결정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정당하게 제정된 법률 역시 인간 존엄의 표현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공동선의 이름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한 선택(이민 제한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하는 이는 없다)을 집단적으로 내리는 정치 공동체의 자유의지를, 그것이 개인의 존엄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단순히 폐기할 수는 없다. 인간 존엄의 주체가 오직 개인만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교회의 서투른 회피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개인이 법을 스스로 판단하고, 불만족스러울 경우 이를 어겨도 된다는 생각을 사실상 ‘성인시성(canonize)’하는 셈이다. 이는 가톨릭 교리의 일관성을 해친다. 합법적 법률을 존중해야 한다는 가톨릭 신자의 책임에 예외를 허용하며, 오직 개인의 존엄만이 문제라는 인간학을 암묵적으로 내세운다. 이는 공동체의 정당한 집단적 의지가 담긴 법적 질서에도 존엄을 부여하는 가톨릭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이다.

    교회 인사들이 이주민의 인간 존엄을 언급할 때, 그들은 중요한 원칙—법을 어겼다고 의심받는 모든 사람을 다룸에 있어 법집행기관이 지켜야 할 태도—을 상기시키려 한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 존엄”을 주장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이민법을 무시할 정당화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해한 논리다. “존엄”이 유효한 법의 집행으로부터 누군가를 면책시켜주는가? “존엄”이 국가가 위법자에게 법을 집행할 권리를 무효화하는가?

    결국, 불법 이민 문제에서 존엄의 이해당사자는 이주민만이 아니다. 그들의 법이 구현하려는 공동체와 공동선 또한 존엄의 권리를 가진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불의한 법은 법이 아니다”라고 가르쳤다. 교회 인사들이 미국의 이민법이 그 자체로 불의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할 용의가 없다면—이는 사실상 ‘국경 개방’을 지지하지 않고서는 논증하기 어렵다.

    미국 정부(예컨대 트럼프 행정부)와 대화하는 교회 측 인사들이 과연 ‘악의적 신앙’, 즉 불성실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은 정당하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1-07 07:21]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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