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76] 로마와 이민 문제
  • 리노 R. R. Reno is editor of First Things. 편집장

  • 서구는 지금 포퓰리즘으로 격랑을 겪고 있다. 유권자들은 세계화의 여파—특히 수많은 지역을 탈산업화로 몰아넣은 결과—에 점점 더 분노하고 있다. 그들은 특히 대량 이주 문제에 격앙되어 있는데, 이는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하고 수호하기를 거부한 채, 다양성의 깃발을 흔들며 새로 유입된 이들에게 편을 드는 데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제적·문화적·정치적 갈등 속에서 로마, 즉 교황청은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 바티칸이 발언할 때마다 서구의 실패한 정치·문화 엘리트들의 목소리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최근 반포된 교황 레오 16세의 사도적 권고 『Dilexi Te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는 그 대표적 사례다. 주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며 문헌은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훌륭한 영적 지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한 부분에서 이주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해당 단락들은 세심한 독법이 가능하긴 하나, 표면적으로는 가톨릭교회가 사실상 국경 개방을 지지할 뿐 아니라 무제한적 이주에 반대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자로 간주한다는 인상을 준다.

    문헌은 성 요한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 주교를 언급한다. 그는 성 카를로 선교회를 설립하여 “이주민들을 목적지까지 동반하며 영적·법적·물질적 도움을 제공하고자” 했다. 실제로 그 수도회는 창립자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수도회였으며, 신세계(미 대륙)로 향하는 이탈리아인 이주민들을 보호하여 그들이 신앙 안에서 잘 정착하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사도적 권고는 이 고귀한 사도직—‘한 민족 안에서, 그리고 그 민족을 위한’ 목자의 사명을—오늘날의 진보적 이상으로 변형시킨다. 문헌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비현실적 언급을 인용한다. “스칼라브리니는 장벽이 없고, 누구도 이방인이 아닌 세계와 교회를 희망하였다.”

    레오 교황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또 다른 연설도 인용한다. “오늘날의 이주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네 가지 동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환대하고, 보호하고, 증진하고, 통합하는 것입니다.” 2025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 표현은 놀라울 정도로 부적절하다. 합법·불법을 불문하고 이주 문제는 유럽의 수십 년간의 정치적 합의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버밍엄 당국은 치안이 보장될 수 없다며 이스라엘인들에게 예정된 축구 경기에 참석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평범한 영국인은 이렇게 묻는다. “영국을 누가 통치하는가? 버밍엄의 이맘들인가, 아니면 우리가 선출해 법 집행을 맡긴 사람들인가?” 이러한 불신은 프랑스, 독일,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동일하다. 이런 첨예한 상황에서 가톨릭교회가 “환대, 보호, 증진, 통합”을 설교한다면, 이는 마치 토착민들의 국기(세인트 조지 깃발)를 흔드는 이들만 아니었다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암시처럼 들린다.

    한편 미국에서는 정부가 국경을 강화하고 대규모 추방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필자는 유럽 국가들도 곧 본격적인 송환 정책에 나설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교회는 거의 어떠한 도덕적 지침도 제공하지 않는다. 필자가 아는 한, 바티칸은 추방의 윤리를 논의하는 학술회의나 협의를 주최한 적이 없다.

    다루어야 할 문제가 많다. 불법 이주의 경우, 추방이 원칙적으로 허용된다—이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유럽의 정책은 “서구에 도달하기만 하면 추방되지 않는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 역시 난민 심사 제도의 남용을 방치하며 비슷한 신호를 보냈다.) 실질적으로 이는 사실상의 초대였으며, 수백만 명이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실상의 초대’의 도덕적 책임과, 그로 인해 추방의 도덕성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대한 세심하고 진지한 가톨릭 윤리 분석을 나는 읽어보고 싶다.

    가족 분리 문제도 있다. 교회는 합법적 처벌 방식으로서의 수형(감옥)을 인정한다. 따라서 가족 분리는 본성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추방되는 가장의 아내와 자녀는 그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점에서, 수감과 달리 송환은 거의 모든 경우 가족 분리를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해야 할 인간적 요소는 있다. 추방 대상자의 배우자가 미국 시민이라면? 혹은 그의 자녀가 시민권자라면? 더욱 적절한 표현은 ‘가족 해체’—오랜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뿌리를 뽑아내는 행위—일지 모른다.

    ‘뿌리 뽑힘’이라는 도덕적 악은 또 다른 사유의 길을 연다. 부동산 영역에는 ‘취득시효(adverse possession)’라는 관습법 원칙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점유 사실에 법적 이의가 제기되지 않으면, 원래의 소유가 아닌 점유자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아마 시민권이나 거주권에 대해서도 유사한 사고방식이 필요할 수 있다. 관습법은 오랫동안 형성된 기대가 지닌 도덕적 힘을 인정하기 때문에 취득시효를 인정해 왔다. 어떤 사람이 20년 동안 방해받지 않고 땅을 일궜다면, 계속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휴스턴에서 20년 동안 아무런 법적 방해 없이 살고 일했다면, 계속 그곳에 머물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교황 재위가 이러한 사유—법과 도덕의 분명한 개념에 기초한—를 장려할까? 레오 교황은 프란치스코로부터 감상적 표어들로 가득한 교도권을 물려받았다. 감상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프란치스코 시대의 교도권은 대체로 현실적 관련성이 없었다.

    탐욕을 꾸짖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각국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경제적 세계화가 자국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거나 탈세계화 시대를 이끌 원리를 마련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대량 이주 문제도 마찬가지다. “동반”을 강조하는 것은 훌륭하다. 교회는 법적 지위와 무관하게 모든 이에게 사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만으로는 공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지침도 주지 못한다. ‘환대’에는 어떤 한계가 있는가? 통합되지 않는 이주 집단(예: 무슬림 집단)에 대해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 통치 권위는 토착민의 공익을 신입 이주민의 이익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할 의무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제기되지 않는다. 대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반복된다. 몇 해 전 필자는 이 비유를 더 잘 이해하게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바이든 행정부 시기 국경 통제의 무력화로 촉발된 이주민 위기로 수만 명의 이주민이 뉴욕에 도착했다. 그들은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비어 있던 고급 호텔들에 수용되었다. 그 첫 대규모 도착 이후 몇 주 뒤였다.

    필자는 평소 가던 카페에서 아침 카푸치노를 사며 주인에게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티베트 출신으로 최근 미국 시민권을 얻은 그가 역겨움이 묻어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사람들은 좋은 호텔에 묵고 있는데, 우리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자고 있어요.”

    그 티베트계 미국인의 “우리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뉴욕 거리에서 많은 미국 태생 시민들이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거의 무심코 방치해 온 현실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시 떠올렸다. 이 비유에서 눈에 띄는 요소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동족을 보고도 같은 민족 사람이 지나쳤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들은 고대판 ‘반(反) 국경수비대 시위’에 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사회’라는 합의가 서구의 시민 질서를 규정했다. 이 합의는 초기에 가톨릭교회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요한 23세는 교회의 ‘창문을 열라’고 유명하게 촉구했다. 공의회 이후 성직자들은 개방성의 정신을 깊이 들이마셨다. 제대 울타리의 제거는 ‘세상에 열린 교회’라는 수용의 상징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가톨릭교회는 20세기 중엽 국제주의의 정서를 받아들였다. 이는 보다 열린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해 서로 긴밀히 엮인 세계를 지향하는 관점이었다. 1950~60년대 유엔에 대한 거대한 기대는 그러한 시대정신의 상징이었다. 그 제도는 결국 불완전한 도구임이 드러났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국제주의의 꿈은 다시 활력을 얻었다.

    베네딕토 16세는 회칙 『진리 안의 사랑( Caritas in Veritate, 2009)』에서 “진정한 세계 정치 권위”의 수립을 촉구했다. 그 목적은 세계 경제를 관리하고 국경을 초월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냉전 이후 구성된 수많은 국제 제도와 협정들—세계무역기구(WTO)부터 국제형사재판소(ICC)까지—이 권위의 일부가 되었다.

    이 신흥 글로벌 시스템의 가장 야심적인 구성체는 2009년 현 형태가 완성된 유럽연합(EU)이었다. 2010년대에는 구속력 있는 국제 규범을 구축하려는 추가 시도가 이어졌다. 2015년의 파리기후협정이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오늘 필자는 21세기 가톨릭교회가 19세기의 오류를 반복할까 우려한다. 당시 교회는 이미 붕괴한 체제에 충성을 고수하며 그 복원을 촉구하였다. 그 체제는 구(舊) 체제(ancien régime)였다. 오늘날 로마는 ‘열린 사회’ 체제의 재건을 위해 싸우는 듯 보인다—이미 여러 사건들, 특히 대량 이주로 인해 신뢰를 상실했고, 유럽인권재판소 같은 제도들은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각국의 시도를 방해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 서구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이 스칼라브리니에게 잘못 투사한 공상적 이상—장벽이 없고, 누구도 이방인이 아닌 세계와 교회—의 나쁜 결과로 휘청이고 있다. 필자는 레오 교황이 그의 이름을 계승하여 복고주의적 충동을 버리고, 탈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가톨릭 사회교리를 재정립하는 과업으로 전환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지침이 필요하다. 장벽을 다시 세우고,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어리석은 공상적 이상을 거부하는 시대에, 우리가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할 것인가?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1-13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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