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수십 년 동안의 정중한 세속적 자신감이 저물어가면서, 사람들은 다시금 하느님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사제나 랍비뿐 아니라 작가, 예술가, 철학자들까지도 인간의 마음이 아이러니와 자기 최적화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재발견하고 있다. 현대 세계는 이미 ‘탈마술화된 상상력’의 끝지점에 도달했다.
여러 교파에서, 한때는 하느님의 이름을 속삭이던 공동체들이 이제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다. 이런 초월성에 대한 새로운 갈망 속에서, 신적 실재를 공적 공간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진지한 시도라면 무엇이든 감사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랍비 샤이 헬드보다 더 힘 있게 그 사명을 수행한 이도 드물다.
뉴욕의 하다르 연구소의 소장 겸 학장인 헬드 랍비는 최근 『유대교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에서 유대교적 하느님에 관한 감동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이 책은 단순한 신학 선언문을 넘어 하나의 ‘도덕적 개입’이다. 헬드는 의식은 물려받았지만 경외는 잃어버린, 윤리적 실천은 알고 있지만 신적 만남은 경험하지 못한 세대를 향해 글을 쓴다.
그는 독자들에게 하느님의 돌보심에 뿌리 내린 신앙을 회복하라고 촉구한다. 그의 말처럼 “하느님은 사랑과 정의의 동반자를 찾으시며, 유대인의 삶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돌보시는 분이며, 그 돌봄이 우리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바라십니다.”
이 신학은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포용적이다. 헬드가 말하는 하느님은 멀리 떨어진 군주가 아니라, 인간이 도덕적 공동 창조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시는 ‘권능을 나누시는 현존’이다. 그러나 바로 그 아름다움 속에 위험도 존재한다.
창조주를 관계성으로만 정의할 때, 그분의 본질을 ‘동반자성’으로만 틀 지어버릴 때, 초월성은 상호성으로 환원되고, 하느님은 우리의 열망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 열망의 근원이신 분으로서가 아니라.
학교를 운영하는 지도자로서 필자는 이런 현상을 매일 목격한다. 우리는 자비와 소속감을 가르치는 데는 매우 능숙하지만, 경외를 가르치는 데는 서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감정을 조절하는 법은 훈련시키면서도, 신비를 인식하는 법은 반드시 가르치지 않는다. 사회·정서 학습은 있지만, 형이상학적 문해력은 없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하느님께서 네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관심을 가지신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런 도덕적 관계 자체가 성립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말하는 일은 드물다. 기도는 마음챙김의 한 형태가 되고, 전례적 행위는 집단 치료의 리듬을 띠며,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 내면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우리가 초월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기 위해 지쳐 쓰러질 것이다. 선택은 단순하다. 그러나 회복은 단순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랑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뿌리 박은 사랑’, 곧 ‘느낌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존재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이신 분’에게로의 귀환이다.
볼로진의 하임 랍비는 이미 두 세기 전에 이 점을 꿰뚫어 보았다. 빌나 가온 엘리야후 벤 슐로모 잘만의 수제자이자 리투아니아 예시바의 창립자인 그는 ‘하느님과의 감정적 친밀성’을 약속하며 유대 세계를 휩쓸던 하시디즘 열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열정을 존중했지만, 그것이 ‘감상주의’로 무너질까 두려워했다.
그의 저서 『Nefesh HaChayim 생명의 영혼』은 신적 실재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가르친다. 곧, 하느님은 “모든 세계를 채우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모든 세계를 둘러싸고 초월하시는 분”이다. 창조는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행위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만물을 존재 속에 붙들어 주신다. 신앙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 두 극점—가까움과 거리, 온기와 경이—사이를 오가는 일이다.
이후 라브 샤가르와 같은 사상가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 리듬을 다시 들려주며 ‘영성은 자기표현이 아니라 자기보다 큰 실재에 마음을 여는 일’임을 가르쳤다.
가톨릭 신학도 비슷한 여정을 걸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현대 세계에 열어젖히며 쇄신과 관계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쇄신은 ‘경외’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초월성을 평평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는 이 균형을 붙들고자 했다. 그의 『주님의 영광』에서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 비움과 위엄, 친밀함과 타자성은 분리될 수 없다. 발타자르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 자체였다.
요제프 라칭거, 곧 베네딕토 16세는 이 비전을 사목적 형태로 펼쳤다. 그의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는 감정이 아니라 존재론에서 출발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이다(is)’라는 동사는 무게를 회복시킨다. 하느님은 단지 사랑스럽게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랑은 존재의 질서 자체이며, 사랑한다는 것은 곧 존재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렇게 볼로진과 발타자르, 베네딕토는 우리 시대가 빠지기 쉬운 유혹—수직을 수평으로, 경외를 공감으로, 초월을 단순한 긍정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에 맞서는 하나의 전선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교육자는 어떻게 ‘경외의 문법’을 회복할 수 있을까? 답은 공감을 추상으로 대체하는 데 있지 않다. 친절이 ‘거룩한 것’임을, 존재 자체가 ‘선물’임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 경외는 침묵과 아름다움에서 시작된다. 질문을 공기 중에 잠시 머물게 두고, 교실 전체가 ‘경이의 무게’를 느끼도록 허용하는 교사는 어떤 강의보다 더 깊은 신학을 가르치는 셈이다.
학생들이 성인이 안식일 촛불을 켤 때 잠시 멈추는 모습을 보거나, 교사가 학습을 ‘언약’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들은 삶 자체가 응답적이라는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서구 전역에서 종교가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아무도 모른다. 종교가 또 하나의 치료적 브랜드가 되어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영성으로 재가공될 수도 있다. 혹은 과거 그랬던 것처럼, 경외를 위한 문법이 다시 될 수도 있다. 이 부활이 깊어질지, 희미해질지는 구호가 아니라 학교에 달려 있고, 홍보가 아니라 교사에게 달려 있다.
한 세대 전 우리는 ‘온기는 없고 규칙만 가르쳐’ 아이들을 반발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무게 없이 온기만 가르쳐’ 절대로 무릎 꿇을 줄 모르는 영혼을 길러낼 위험에 놓여 있다. 신앙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의 ‘그분의 무게’를 회복해야 한다. 아이들은 단순한 긍정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자신을 부를 수 있는 세계, 자신을 향해 명령할 수 있는 세계가 필요하다.
필자가 학생들에게 단 하나의 선물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협상 가능하다고 말할 때에도 변치 않는 무엇의 떨림을 느낄 수 있는 감각. 사랑을 말할 때,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그 사랑을 의미하는 감각. 세상은 더 많은 ‘기분 큐레이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은 ‘신비의 중개자’를 필요로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