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 오랜 친구와의 만찬 자리에서 요즘 왜 우리 둘 다 전미 프로풋볼(NFL)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끊임없는 반칙 선언(대개 터무니없이 긴 비디오 판독으로 이어진다), 핵심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 경기 중 도박 광고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터치다운 후 벌어지는 미성숙하고 선정적인 과시적 ‘세리머니’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에드 설리번 쇼에 처음 출연했을 때, 왜 그가 허리 위까지만 화면에 잡혔는지를 일깨워 주는 듯한 장면들이었다.
필자의 친구는 앨라배마 대학교 학부 재학 시절, 1958년부터 1982년까지 팀을 이끈 전설적 감독 폴 베어 브라이언트 아래에서 풋볼을 뛰었다. 그는 브라이언트 감독이 선수들에게 늘 하던 지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엔드존에 들어가거든, 마치 거기에 와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라.”
그 말은 자연스레 1960년대 볼티모어 콜츠의 런닝백 알렉스 호킨스가 팀의 쿼터백이었던 위대한 존 유나이타스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베어스가 20–17로 앞서 있었고, 경기 종료까지 몇 초만이 남은 상황에서 콜츠는 40야드 라인 안쪽에서 공을 쥐고 있었다. 3다운에서 유나이타스는 레니 무어에게 깊은 패턴을 지시했다. 베어스는 블리츠를 걸었고, 빌 조지가 유나이타스의 다리 한쪽을 붙잡았다. 그는 더그 앳킨스가 따라잡아 마무리 태클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래 붙들고 있었다.
유나이타스는 천천히 일어났는데, 우리는 그가 다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레이너와 의사들이 달려오던 그때, 더그는 쓰러진 그의 몸 위에 우뚝 서서 잠시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자, 꼬마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 유나이타스는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지, 그게.”
유나이타스의 얼굴을 본 나는 토할 것 같았다. 그의 코는 찢어지고 일그러졌으며 얼굴은 도끼로 내려친 것처럼 피투성이였다.
트레이너들은 그의 코를 솜으로 가득 채웠고, 유나이타스는 다시 필드로 뛰어들어갔다. 허들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코가 정상 크기의 두 배로 부어 있었고, 두 눈도 거의 부어 떠지지 않을 정도였다. 타임아웃도 없고 시계에는 단 19초만이 남아 있던 4다운에서, 유나이타스는 앞서와 동일한 깊은 패턴을 무어에게 다시 지시했다. 무어는 수비수를 따돌렸고, 유나이타스는 정확한 39야드 터치다운 패스를 쏘아 올려 24–20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것은 필자가 본 가장 극적인 결말이자 말도 안 될 광경이었다. 그런 일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일을 만들어낸 사람, 존 유나이타스는 마치 일상적인 일을 마친 것처럼 필드를 걸어나갔다. 하이파이브도, 춤도, 자축도 없었으며, “우리가 1등이다”라는 손가락 제스처도 없었다.
이 경기를 뛴 최고의 쿼터백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무심하게 걸어 나갔다. 얼마나 자주 그런 품위를 볼 수 있는가?
2002년 9월 23일자 표지 기사에서 호킨스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는 얼마나 강했는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제목은 호킨스가 말하려던 요점을 비껴갔다.
물론 존 유나이타스는 강인했다. 대공황 시기 피츠버그에서 리투아니아계 이민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세미프로 모래밭 풋볼을 뛰며 자란 그에게 강인함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더 핵심은, 그는 자신의 일을 장인적 소명으로 대하며, 그것을 잘 수행하는 데 정당한 자부심을 가지는, 천성적으로 품위를 지닌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평생 신자로 살았던 존 유나이타스가 레오 13세 교황의 사회교리 기초 회칙인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을 읽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노동의 존엄, 노동자 인간의 존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이 자기 과시적 퍼포먼스 아트, 즉 “나, 나 자신, 그리고 나”라는 거짓 신에게 바치는 저속한 축제로 전락할 때 그 존엄이 훼손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방금 이겨낸 상대를 향해 도발적 태도를 취한다면, 자신의 일의 존엄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존엄도 깎아내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타인의 고된 노력에 대한 스포츠맨십적 존중을 그에게 길러주었다.
우리의 경기 문화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우리의 문화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의 일부다. 그리고 정치는 문화의 하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엔드존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자기 과시와 그와 유사한 타락들이 필연적으로 정치에도 독처럼 스며들게 된다.
다음번에 NFL 중계나 어떤 공직자의 발언을 음소거하려고 할 때, 이 연결고리를 기억하라.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