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는 사라졌다. 그 위에 세워졌던 서구 문명 대부분도 함께 쇠퇴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낯설고 이방인 같은 땅에서 순례자로 살아가고 있다.
애런 렌은 이러한 시대적 환경을 “부정적 세계”라고 부른다. 이 부정적 세계에서는 공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회적·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정적 세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교 세계와 그 문명이 붕괴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한 가지 답을 제시한 인물이 제임스 셰이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제도들의 방향을 단순 유지에서 선교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교, 신학교, 평신도 운동, 본당, 교회 공동체 등 가톨릭 생활의 모든 영역이 복음 선포와 선교적 사명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옳은 말이다. 사도적 시대에는 우리가 사도로 살아야 한다. 선교 사명은 곧 선교 그 자체이다.
셰이의 이러한 ‘지상명령’ 재정립은 미국 내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셰이의 목적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해석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의 틀은 실행 매뉴얼이 아니다. 그것은 렌의 ‘부정적 세계’ 이론과 마찬가지로 행동 지침서가 아니다.
행동 지침서에 가까운 접근은 오히려 개신교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왔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가 존속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물리적 공간, 부동산, 그리고 기업과 생산 자산에 대한 소유와 통제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는 로드 드레허의 ‘베네딕트 옵션’과 유사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핵심은 자산 소유라는 점을 강조한다. 필자는 이러한 접근을 ‘그리스도인의 소유 극대화 (Christian Ownership Maximalism)’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의 소유 극대화는 경제의 생산적 자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유 지분을 확대하여 하느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권고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그리스도교적 소유 개념 자체가 이러한 결론을 암시한다. 그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소유는 ‘권위(authority)’이다. 이는 사물과 피조물에 대해 정당하게 행사되는 권능을 의미한다. 이는 잘 알려져 있고 별다른 논쟁의 대상도 아니다.
둘째, 모든 형태의 소유가 동일하게 중요하지는 않다. 생산 수단의 소유는 소비재의 소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론적으로는 100만 달러 상당의 소비재를 가진 사람이 동일한 가치의 생산 자산(기업이나 부동산 등)과 교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서 소비재 소유자는 생산 수단 소유자와 달리 구조적으로 ‘의존적’이다. 핵심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구분이 아니라, 의존적인 인간과 독립적인 인간의 차이이다.
이 점이 과거의 경제학자들이 “경제 권력은 생산 수단의 소유에 있다”고 말했던 의미이다. 생산 수단을 가진 사람은 단순히 더 독립적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산출물을 보류하거나 철회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까지 대부분의 경제사상가들에게 자명한 것이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소유와 비(非)그리스도인의 소유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권위와 비그리스도교적 권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목적(τέλος, telos)이 본성을 규정하며, 그리스도교 철학은 소유의 목적을 근대 계몽주의 이후의 이해 방식과 전혀 다르게 본다.
그리스도교적 재산 개념은 자연법에 따른 것이며, 하느님의 권위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인간이 피조물을 관리한다는 원리를 전제로 한다. 반면 비그리스도교적(근대 자유주의적) 재산 개념은 ‘주권적 소유’, 즉 사회계약(국가)이 중재하는 완전 처분권을 말한다. 이 이해에서는 소유권이 자연법적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회계약이 만들어낸 제도적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소유의 정당성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가 아니라 국가가 부여한 법적 허용 안에서만 성립한다.
그리스도교적 재산 개념은 “나는 내 재산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탈(脫)기독교적 소유 개념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거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자유주의적 재산관은 “법이 허용하는 한 너의 욕망대로 하라”는 것이다. 이는 정당한 권위로 가장된 힘(power)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소유 개념은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복음서에는 재산과 소유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가득하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진 소유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하셨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경고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내가 요구하리니, 그러면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또 다른 곳에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마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또한 주님은 주인의 재산을 주인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충실한 집사를 칭찬하신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소유가 무제한적 허용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하는 소명임을 명확히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적 소유가 ‘참된’ 소유 개념이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생산 자산에 대한 ‘소유 지분’을 확대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부를 극대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경제적 권력을 그리스도의 섭리를 위한 정당한 권위로 전환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소유 극대화이다.
렌, 더그 윌슨, 제프 더빈과 같은 저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생산 자산을 적극적으로 확보하고 이를 충실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이러한 소유를 단순한 세속적 야망이 아니라, 신학적·전략적 필연성으로 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업, 토지, 기타 자원 등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운영할 때 비로소 문화와 사회를 하느님의 질서에 따라 재형성할 힘을 갖게 된다고 믿는다.
R. J. 러시두니와 게리 노스가 체계적으로 주장한 ‘그리스도교 재건주의’는, 성경적 통치 원리가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경제 구조—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신자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장려하고, 부동산에 투자하며,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함으로써, 사회를 아래로부터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지배 명령을 실천하라고 촉구한다.
이러한 흐름은 오래된 칼뱅주의 전통과 연결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리스도의 주권이 “피조물의 모든 한 치라도” 벗어나는 곳이 없다고 선포했다. 정치, 예술, 경제 어느 영역도 하느님의 주권 밖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이를 운영하는 것은 자기 확장이나 이윤 추구가 아니라, 공동선을 증진하기 위한 ‘청지기직’에 대한 응답이다.
칼뱅주의 사상가들은 전통적으로 규율 있는 노동, 책임 있는 기업 활동,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경제 활동도 성스러운 소명의 차원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영향력 구축’은 수 세기 전부터 내려온 개혁주의의 전통을 잇는다.
가톨릭은 이 흐름에 비교적 늦게 합류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해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한 면이 있다. 이해되는 이유는 가톨릭교회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와 복잡한 관계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재산권을 자연법의 기초로 인정하며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지만, 동시에 상업 사회가 야기하는 심각한 위험도 경고해 왔다.
낙태 산업, 중독성 제품, ‘오락용’ 마약 산업은 결국 기업가와 시장을 통해 등장했다. 교회는 이미 100년 전부터 이러한 비인간적 시장 결과들을 예견하며 경고해왔다. 그래서 가톨릭 사회교리는 보다 일반적인 원칙을 강조하며, 인간 존엄을 고양하는 사회 구조를 추구하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 ‘기독교적 경제 권위의 확대’에 머뭇거려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서구의 재산 개념, 그리고 그에 따른 권리·의무의 이해는 가톨릭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계몽주의 이후 재산을 “사회계약이 허용한 주권적 영역”으로 보는 관점과 달리, 가톨릭은 재산을 인간에게 자연적—즉 본성에 속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소유가 인간 번영의 핵심적 토대라는 인식은 개신교만의 것이 아니라 가톨릭 정치철학에도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둘째, 서구 문명은 유럽 가톨릭에서 태어났고, 물질적 측면에서도 ‘기독교적 소유 극대화’에 기반하여 형성되었다. 즉, 서구 문명의 기반은 봉건제였으며, 봉건제는 생산수단의 소유에 사회적·신학적 의미를 부여한 제도였다. 마르크스는 이를 매우 정확하게 보았다. 그는 가톨릭 종교를 봉건제라는 경제적 토대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라고 여겼다. 생산수단을 소유했던 봉건 영주들은 그 권력을 행사했지만, 교회가 부과하는 의무 안에서 움직였다. 영주는 교회의 사명과 공동선을 위해 일정한 책임을 져야 했다.
셋째, 가톨릭은 사실상 자기가 만든 전통을 잊어버린 셈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소유 극대화’라는 원리는, 가톨릭적 정치경제관 가운데 가장 가톨릭적인 전통—즉 분배주의—의 한 변형이기 때문이다. G. K. 체스터턴과 힐레어 벨록이 대표하는 분배주의는, 생산수단의 광범위한 분산 소유가 자유와 덕을 증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분배주의는 소유를 통해 공동체가 강화되고 인간이 고양된다는, 매우 가톨릭적인 원리를 강조했다. 그 의미에서, 기독교적 소유 극대화는 분배주의의 현대적 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