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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엄 촘스키 |
미국의 저명 언어학자이자 좌파 지식인으로 서구 좌익 진영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추앙받아온 노엄 촘스키가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은 사적 네트워크를 유지해왔다는 정황이 또다시 드러났다.
미 의회가 최근 공개한 이메일 자료는 촘스키가 단순한 ‘정치·학술 대화’ 이상의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음을 보여주며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 단순한 학술 교류? “음악 취향·휴가 계획까지 공유한 사이”
영국 가디언이 분석한 의회 공개 이메일에 따르면, 촘스키와 엡스타인은 정치·철학적 담론을 나누는 수준을 넘어 사적인 생활, 취향, 여행 계획까지 공유하는 일상적 친밀성을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간 촘스키가 주장해온 ‘가끔 대화를 나눴을 뿐’이라는 해명과 배치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촘스키가 작성한 한 통의 지지 서한이다. 수신자는 불명이나, 서한 내용은 극도로 개인적이고 호의적이다.
■ “엡스타인은 소중한 친구… 나에게는 귀중한 지적 자원”
촘스키는 서한에서 엡스타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의 끝없는 호기심, 폭넓은 지식, 통찰력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는 곧 소중한 친구이자 지적 교류의 원천이 됐다.”
또한 그는 엡스타인이 자신에게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언론이 하지 못한 방식’으로 설명해 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엡스타인이 학계·정재계를 상대로 구축한 막강한 영향력을 촘스키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촘스키는 심지어 엡스타인이 이스라엘 전 총리 에후드 바라크, 오슬로 협정 담당 노르웨이 외교관 등 주요 인사들과 직접 연결해줬다고 밝히며, 엡스타인이 국제 정계에 뿌리 깊은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음을 강조했다.
■ 반복되는 의혹… “27만 달러 송금도 엡스타인 관련 계좌였다”
공개된 자료에는 2015년 엡스타인이 촘스키에게 뉴욕·뉴멕시코에 있는 자신의 저택 사용을 제안한 이메일도 포함돼 있다. 촘스키가 실제 해당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단순한 학술적 지인의 범위를 넘어선 관계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촘스키와 엡스타인의 친밀성 의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5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촘스키가 엡스타인과 연결된 계좌에서 약 27만 달러를 이체받았다고 보도했다.
촘스키는 “엡스타인에게서 돈을 받은 적은 없다”고 강하게 부인하며, 이체는 “부인 사망 후 공동 자산 정리 과정에서 ‘기술적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했지만, 엡스타인이 자산 운용을 통해 수많은 인맥을 길들이고 관리했다는 기존 패턴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 “좌파 PC(정치적 올바름)의 대부”였던 촘스키, 신뢰 무너지나
촘스키는 오랫동안 반전·반권력·반제국주의의 철학을 내세우며 ‘도덕적 양심’의 역할을 자처해온 대표적 좌파 지식인이다. 그런 그가 엡스타인과 이렇게까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은 그의 명성과 철학적 일관성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있다.
특히 촘스키는 엡스타인 관련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불성실한 해명 또는 회피성 답변으로 일관해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이메일 공개로, 촘스키가 엡스타인의 영향력 네트워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지고 있다.
■ 끝까지 침묵하는 촘스키 측… 논란은 계속될 듯
그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아내 밸러리아 와서먼 촘스키와 소속 대학인 애리조나대는 이번 의혹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촘스키는 최근 건강 악화로 브라질에서 요양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엡스타인 문건 추가 공개가 예정돼 있어 추가 폭로가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높다.
새롭게 드러난 이메일은 하나의 사실을 명확히 한다. 촘스키와 엡스타인의 관계는 일상적·실질적·지속적인 친밀성을 띠고 있었으며, 이는 오랫동안 촘스키가 강조해 온 ‘단순한 지적 교류’라는 주장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이다.
엡스타인의 정·재계 네트워크에 또 하나의 영향력 있는 이름이 깊숙이 얽혀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촘스키의 도덕적 권위와 학문적 신뢰도는 앞으로도 계속된 검증과 비판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안·희·숙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