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91] 뉘른베르크에 대한 나의 판단
  • 존 M. 그론델스키 John M. Grondelski is former associate dean of the School of Theology at Seton Hall University, South Orange, New Jersey, and a retired foreign service officer. All views are his own. 신학대학 전 부학장, 전직 외교관

  • 스탠리 크레이머의 1961년 영화 Judgment at Nuremberg(뉘른베르크의 재판)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다룬 미국의 고전으로, 최상의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으로 널리 인정받는다. 반면 제임스 밴더빌트의 2025년 영화 Nuremberg는—점잖게 표현하자면—그저 ‘마이너 리그’ 수준이다.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범죄와 반인도 범죄로 기소된 독일인들을 대상으로 한 첫 뉘른베르크 재판 80주년이다. 이 재판은 전후 독일의 탈나치화 과정의 일부였으며, 일부는 그 과정이 결함 있고 선택적이었다고 보았지만, 모든 것을 고려하면 다른 독재체제 이후 국가들이 채택했던 “진실과 화해” 혹은 폴란드식 “굵은 선 긋기”(gruba kreska) 절차들보다 훨씬 필요했고, 또한 훨씬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과정들과 뉘른베르크를 연결하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범죄와 악의 ‘심리학적 전환(psychologization)’이다.

    ‘뉘른베르크의 재판’은 주로 법적·도덕적 질문들에 초점을 둔다. 어떻게 유럽 문명의 선두를 자처하던 나라 한복판에서 그러한 악행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반면 ‘Nuremberg’는 히틀러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러셀 크로우)과 미 육군 정신의학자 더글러스 켈리(라미 말렉)의 구치소 내 대면에 초점을 맞춘다. 켈리는 괴링이 자살로 처형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그에 대한 정신의학적 통찰을 통해 그의 기소를 돕는 임무를 맡았다.

    두 영화 모두 악의 문제를 다루지만, ‘Nuremberg’는 현대적 취향의 결함을 반영한다. 곧 “인간이 무엇을 했는가보다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범죄의 ‘정신의학화’는 “판단하지 않는” 현대적 사고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곧 ‘심판(judgment)’ 없이 정의(justice)를 행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Nuremberg’의 한 대사는 그러한 자기기만을 잘 보여준다. 미국 대법관 로버트 잭슨—뉘른베르크 재판의 미국 측 검사—은 재판이 반드시 나치즘을 완전히 정통성 상실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의 독일 땅 어디에도 이 범죄자들의 동상이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심판이 부재한” 경우와 비교해 보라. 푸틴의 러시아 곳곳에는 여전히 스탈린의 동상이 서 있다.

    사실 ‘Nuremberg’는 역사적 균형에서도 불편함을 준다. 실제로 뉘른베르크에는 피고가 재판받을 능력이 있는지 평가하는 책임을 맡은 정신과 의사 켈리가 있었다. 흥미로운 관점이긴 하지만, 재판의 중심도 아니고, 역사적 사실의 본질에서 보면 3차적 요소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미국 일반 대중의 기억에서 희미해진 지금, 영화는 이 주변적 요소를 과도하게 부각한다. 그것은 이 관점이 중요한 때문이 아니라, 현대 지성의 편향과 맞물리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또한 영화는 익히 알려진 역사적 오류들을 되풀이한다. 영화 초반 재판 장면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나치의 ‘노동수용소’가 정말로 ‘절멸’을 목적으로 했는지 의문을 품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재판은 V-E 데이(종전)로부터 이미 6개월 뒤에 시작된 것이다.

    미군은 1945년 4~5월 다하우, 마우트하우젠, 부헨발트를 해방했다. 폴란드 지하조직 연락원 얀 카르스키는 이미 1943년 루스벨트 대통령과 대법관 펠릭스 프랑크퍼터에게 폴란드 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직접 보고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의 저서 『비밀 국가 이야기(Story of a Secret State)』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1944년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폴란드 망명정부가 독일의 잔혹행위를 기록한 『폴란드의 흑서』는 1942년에 출판되었다.

    영국의 격언은 이 모든 “충격을 받았다”는 서방인들의 태도를 정확히 말해준다. “보지 않으려는 사람만큼 눈먼 이가 없다.” 루카 복음 18장에서 한 맹인은 예수님께 “보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이는 반(反) 기도에 가깝다.

    또 다른 역사적 왜곡도 있다. 영화는 잭슨이 교황 비오 12세를 방문해,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교황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고 묘사한다. 정치인들이 정의를 추구하는 데 합의하지 못하면, 도덕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를 붙잡아 정당성을 얻어내려는 전략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비오 12세가 잭슨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잭슨이 교황에게 “교황은 나치 편이냐”고 묻는 긴장된 장면으로 연결된다. 심지어 바티칸이 히틀러와 콘코르다트(concordat·교황청과 국가 간 조약)를 체결함으로써 가장 먼저 히틀러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비난한다.

    이 모든 것은 롤프 호흐후트의 1963년 문제작 『대리인(The Deputy)』을 연상시키는 설정이다. 그 작품은 비오 12세를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희곡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라고 보는 지점은 정신과 의사가 윤리학자를 자처하는 점이다.

    영화 속 켈리는 다소 순진한 인물로, 오랫동안 “제2인자”들의 범죄 책임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괴링의 어린 딸이 피아노를 고운 소리로 연주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나치 경비병들도 가스실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기지로 돌아가 자기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었다.

    켈리는 결국 깨어나지만, 필자는 그가 그토록 오래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필자는 괴링의 악행이 나치에게만 독특한 것은 아니라는 켈리의 견해에도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이 아니다.

    실제 켈리는 “그들은 인간이 모두 그렇듯 단지 그 환경의 산물일 뿐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환경은 그들에게 극악한 악을 선택할 ‘기회’를 주었고, 그들은 그 선택을 했다. 그러나 가장 타락한 환경에서도 모든 인간이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는다. 수용소는 성인(聖人)도 만들어냈다.

    따라서 여기서 기본 분석 범주는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이다. 헤르만 괴링이 수백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구조에 책임이 있었던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나치의 문제—그리고 모든 인간의 문제—는 머릿속이 아니라 영혼(soul)의 문제이다.

    오늘날에도 하나의 “검은 전설(black legend)”이 남아 있다. 곧 반유대적 나치 독일이 극단적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운영한 국가였다는 주장이다. 혹시 ‘Nuremberg’가 미국에서 ‘잠재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소문 속 암묵적 크리스천 파시즘에 대한 ‘경고’로 제작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나치 독일은 이교적(pagan) 국가였으며, 그 지도자들은 훨씬 이전에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니체적 권력 이데올로기를 선택한 자들이었다.

    문제는 이 신화가 마치 기독교 자체를 저주인 양 제시하면서,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포기—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듯 ‘하느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가 만들어낸 악마적인 악은 처벌받지 않은 채 사라진다는 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1-28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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