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한때 본당 사제로 전임 사목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아직 신자들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던 시기였다. 어느 본당에서는 첫 해 동안 본당 신자 모두를 방문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150가구..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숫자였다.
방문을 시작하면 대화는 각기 다르게 출발하곤 했지만, 결국에는 교회에 대한 무언가의 질문, 불평, 희망, 우려, 제안, 열정적인 신념들이 나왔다. 필자는 그 이야기들을 경청하려 애썼고, 마음에 담아 돌아왔다. 일부 의견은 가볍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었고, 교회는 그들이 어떤 표현을 쓰든 간에 깊이 생명력을 주는 실재였다.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필자는 그 많은 우려에 다 응답할 수는 없었다. 본당은 회의체, 예산, 교구장(주교), 교리, 비전, 선교, 이런저런 사도직을 따라 굴러간다. 뜨거운 신념들도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종종 접어두어야 한다. 몇몇은 자신들의 희망이나 필요가 충족되지 못해 결국 본당을 떠났고, 다른 이들은 꾹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자신들의 의견은 그다지 결정적이지 않다고 여겼는지 모르지만, ‘듣지 못했다’는 감각은 소속감 자체를 약화시키곤 했다.
대부분은 계속 남아, ‘전체’가 자신의 태도를 이끌도록 내버려두었고 그 반대는 아니었다. vestry(평신도 사목위원)에 있던 한 사람이 말하길,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양 떼를 떠나는 것이지만,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 그 자체가 아닙니다. 양 떼와 함께 가는 게 좋습니다.”
본당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은 아닐지라도, 정치 공동체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다. 교회 안에도 복음적이지 못한 요소들이 있다면, 정치 행위는 본성상 더욱 복음적일 수 없다. 물론 정치는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복음과 온전히 합치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자기방어를 위한 행위(살인까지도 포함해서), 신용카드 이자로 생필품을 구매하는 것, 세금이 낭비되거나 도덕적으로 부당하게 쓰일 것을 알면서도 세금을 납부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은 복음과 무관하거나 중립적이지 않다. 부분적으로는 복음에 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피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는 이와 같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정치는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러나 모든 사람을 위해서는 아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위해서도 아니다. 이 사실은 정치철학의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라고 보았고, 그 때문에 정치를 개인의 필요보다 우월한 선으로 보았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한나 아렌트, 카롤 보이티와(성 요한 바오로 2세), 미셸 푸코와 같은 사상가들이 이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사회”나 “국가”라는 이름의 정치적 행위가 결국 개인을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정책은 집단의 경로, 유인책, 총량, 기업적 연대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개인을 삼켜버린다. 이것을 “정치적 분류(triage)”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개인의 소멸 뒤에는 최선의 사회적 동기가 있다. 공적 제도 강화, 교육 기회의 확대, 빈곤 완화, 건강보험 확대, 장애인 접근성 개선, 공공 공간의 안전 확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촉진 등. 그러나 의료제도가 개편될 때마다 감당할 수 없게 된 중산층 가정과 노동자가 있으며, 장애인 주차 공간을 확보할 때마다 문을 닫게 되는 영세 사업자가 있고, 한때 배제되었던 학생과 주제가 새로 포함될 때마다 시간표와 교육과정 변화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학생이 있다. 이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전체의 선을 위해 내리는 결정에는 언제나 ‘어떤 누군가’가 남겨진다.
“epieikeia”—일반적으로 ‘형평(equity)’이라 불리는 개념—는 정치적 결정(법)의 엄격한 적용을 조정하여 개별적 필요와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려는 시도다. 바로 “옳음”이 아니라 “공정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근대 초기 영국에서는 Chancery(형평법) 법원이 존재하여,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릴 양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형평은 정치적 분류의 문제—전체를 위한 결정을 내리면 필연적으로 소수의 고통이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형평의 적용이 실제로 고통을 줄여준 적은 드물다. 특히 근대 이후 인구 규모가 거대해지고, 공동체의 삶은 대규모 집단 단위로 정의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숫자가 커질수록 그 숫자는 추상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개인을 고려하는 통치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다. 숫자가 커질수록 정치적 분류는 심화된다.
가장 명확한 예가 의료다. 모두가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의료체계(그리고 대부분의 나라가 가진 체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당할 수 없고, 우리가 원한다고 말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며, 그 과정에서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병자들의 등 위에서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 있다.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의료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필자는 그들의 노력을 응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거대한 수의 사람들의 문제를 개별적 필요를 반영하면서 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불법 이민 문제를 보라. 어떤 국가든 해결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내가 사랑하며 섬기는 본당 신자들을 포함한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정책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나 역시 영향을 받는다. 정책이 아무리 ‘무염시태’처럼 완벽하게 고안되었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함께 나누는 성찬례를 해체시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정치적 행위 속에서 개인이 흐려지고, 심지어 사라지는 현상은 단순한 무능이나 악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타락(fallenness)의 표지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 새끼들이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리라”(이사 11:7): 이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사자가 먹이가 없는데 숲에서 부르짖겠느냐?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아모 3:4): 이는 오늘의 현실이다.
정치 안의 잃어버린 양을 위한 탄식은 단순히 정치적 중용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회개의 호소다.
이 점에서, 정치는 설교와 닮아 있다. 설교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공경하려 노력해도 결국은 신성모독하는 셈이 된다. 칼 바르트가 말했다고 전해지듯이, “모든 설교는 이단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유한한 노력이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 가운데 단 한 지점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노사제가 필자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강론을 하러 단 위에 올라갈 때마다 떨렸습니다. 강론이 진행될수록 두려움이 커졌습니다. 나는 분명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을 터였습니다. 강론을 마치고 내려올 때면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설교는 나에게 사순 시기의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오래전에는 그 말이 과장처럼 들렸다. 그러나 필자 또한 오랜 세월 설교를 해오면서 그 염려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신약이 가르치듯, 특히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는 “혹독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마태 18:6). 나는 얼마나 자주 하느님을 제대로 증언하는 데 실패했던가! “말씀”은 실로 “무거운 짐”(말라 1:1)이다.
그러나 우리는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필연적으로 두려움과 슬픔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러한 심정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명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가르치는 이로서 더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의 스승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야고 3:1).
정치는 어떠한가? 두려움과 슬픔은 정치에도 마땅히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특히 정치 앞에서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정치적 결정 하나하나가 주님께서 이름으로 부르시는(요한 10:3) 어떤 양의 등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설교처럼, 정치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 정치의 짐을 질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버릴지 누가 알겠는가?
18세기 프랑스 도덕주의자 니콜라 드 샹포르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지위가 사람을 얼마나 타락시키는지 보고 싶다면, 그 지위가 가장 오래 영향을 미친 이들—노년의 신하, 노년의 사제, 노년의 판사—을 보라.”
사제들에 관해서라면 내 말도 덧붙일 수 있다. 많은 사제들이 슬픔을 안고 있다. 어떤 이는 쓰라리기까지 하다. 사목과 행정과, 안타깝게도 설교 속에서, 우리는 너무도 열정적으로 영혼의 분류를 실행해왔다. 그리고 슬퍼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그는 슬퍼해야 한다. 우리는 양 떼의 필요에 헌신하면서 잃어버린 양을 잃었다.
정치가들에 대해서는 나는 말할 수 없다. 헤로데 대왕은 훌륭한 국가 건설자였다고 많은 역사가가 평가한다—베들레헴의 아기 살해는 별론으로 두고. 그리스도인 정치인은 이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우리는 희망한다. 무고한 이를 죽이지 않고 나라를 세우는 정치인 말이다.
그러나 더 나은 통치라 하더라도 정치적 분류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정의롭고 성결한 통치자, 판관, 입법자라도 어느 깊은 자리에서는 자신의 주님을 우러러보며, 사제와 왕에게 향한 그분의 거절하시는 시선을 바라보며, 울부짖어야 한다(애가 2:6).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