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주 사이, 신학자 제이컵 필립스는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여러 가톨릭 행사에서 강연했는데, 그 자리들은 대부분 18~30세의 최근 개종자들—특히 젊은 남성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제들마다 ‘연간 성인 입교자가 한두 명이던 때에서, 이제는 매년 부활 시기에만 20~30명으로 늘었고, 그 이후에도 이미 두 자릿수의 예비 신자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내온 어떤 연로한 신부님의 생생한 표현을 빌리자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연로한 신부님은 가톨릭 진리 협회에서 나온 새 책 ‘세속화를 넘어서(After Secularisation)’를 펼쳐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버나뎃 더컨, 한나 본-스프루스, 스티븐 불리번트가 공동 집필한 이 책은 젊은 남성 신자들의 개종 문제만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 영국—특히 “성모 마리아의 지참금(Mary’s Dowry)”이라 불리던 이 나라—에서 지금 많은 이들이 조용히 질문하게 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그 동력을 탐구한다.
물론 오늘날 서구 대부분의 나라에서 현대 교회를 논하는 모든 책은 먼저, 한때 가톨릭 신앙의 삶이 이루어지던 단일하고 거대한 “성스러운 차양(sacred canopy)”—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비유—이 낮춰지고, 해체되고,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세속화를 넘어서’ 역시 이 현실을 분명히 직시한다. 이탈률은 상투적이면서도 동시에 놀라울 정도다. 영국 성인 약 720만 명이 유아 세례를 받았지만, 조사에서 자신을 가톨릭이라고 밝히는 이는 360만 명뿐이고, 주일 미사에 실제로 나오는 이는 50만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속화를 넘어서’는 또한, 그 거대한 차양이 무너진 자리에서 작은 “우산들”이 이곳저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매력적인 광경을 제시한다. 이 우산들은 흩어진 지점들에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다시 하나로 모아 제자도의 작은 공동체들을 형성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훨씬 더 친밀하고, 개성적이며, 특이한 방식으로 그 역할을 이어간다.
저자들은 다섯 종류의 ‘우산 펼치는 이들’을 제시한다.
첫째, 본당을 재활성화하고 재창조하려는 이들—‘지리적’ 본당(“집 근처의 성당”)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어디에 있든 ‘영적 필요를 충족하는 교회’라는 ‘실존적’ 영토가 중요해지는 시대에 부응하는 흐름이다.
둘째, 국제 단체 Youth 2000에서부터 스코틀랜드 작은 마을의 내슈빌 도미니코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청년 단체의 참여자들.
셋째, 우크라이나, 나이지리아, 폴란드 등지에서 온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이들은 다른 교단들과 비교했을 때 영국 가톨릭의 상대적 안정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넷째, 대학의 가톨릭 학생회에 점점 더 많이 모여드는 학생들.
다섯째, 전통 라틴 미사 공동체(Traditional Latin Massers).
이 책은 독자를 마치 영국 전역을 함께 여행하는 침묵의 동반자로 초대하며, 우산 하나하나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여정은 웨스트 브롬위치에서 시작된다. 중부 지역의 탈산업화된 이 도시—그곳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평범함’의 대명사처럼 들릴 수도 있는—에서, 시로-말라바르 가톨릭이 운영하는 월례 집회에는 무려 3천 명이 모인다. 여정의 마지막은 잉글랜드 북부의 ‘프레오스타툰(Preosta-tun)’—옛 영어로 ‘신부들의 마을’을 뜻하는 프레스턴—이다. 한때 가톨릭의 심장이었던 이곳에서, 전통 전례를 지키는 그리스도 왕 주권 사제회가 폐쇄 위기였던 두 성당을 맡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 여정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 얇은 책은 이 질문들에 대한 완전한 답을 제시하려 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수년 동안 이를 탐구할 ‘베이스캠프’를 제공한다.
첫번째 질문 : 이 작은 우산들이 언젠가 충분히 커지고, 충분히 밀집하여, 이전보다 더 조각보 같은 형태일지라도,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참여를 통해 견고해진 새로운 형태의 거대한 차양으로 다시 결합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물음에서 파생되는 질문들..우산들 사이에 인위적인 일치를 도모해야 할까? 그렇다면 언제? 혹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할까?
두번째 질문 : 이처럼 활기찬 다양성이, 실은 절망적 분열을 가리는 가면처럼 작용할 위험은 없을까? 저자들은 그 위험은 “낮다”고 본다. 전통 전례와 ‘사목적 배려’는, 그들이 보기에,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전통주의든 아니든, 이 책이 살펴본 여러 하위 공동체들에서 의심이나 무지, 불확실성의 표현은 배제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혁신과 재발명 속에서도 “교리와 전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을 붙드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저자들은 결론에서 영국 전례 생활의 “긴 꼬리(long tail)”—즉, 자기 본당의 일반 미사(novus ordo)에 참석하지 않고 다양한 틈새 공동체에 속하는 주일 미사 참례자 25%—가 가져다주는 유익을 옹호한다.
흥미롭게도,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세속화를 넘어서’ 전반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가톨릭 실천은 미사도, 고해성사도, 성경 공부도, 기도 모임도 아니다—물론 모두 포함되긴 하지만—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성체 조배(adoration of the Blessed Sacrament)’였다. 이는 의미심장하다. 성체 조배만큼 현대 문화에 역행하는 가톨릭적 습관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말없이, 움직이지 않는 단 하나의 성체 앞에 앉아 있거나 엎드려 있는 것.. 반면 세상은 우리에게 몇 시간이고 소음 가득한 30초 영상들을 끊임없이 넘겨보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면 왜 특히 젊은이들이 성체 조배를 찾는가? 아마 그들은 점점 깨닫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어떤 이는 조심스럽게, 어떤 이는 보다 확신에 차서—현대 문화가 제시해 온 삶의 방식, 즉 한 젊은 인터뷰 대상자가 표현한 “초개인주의적이며 나만의 깨달음 추구 방식”이 결국 자신들을 속였다는 것을.
성체 조배는 그 신비, 온유함, 침묵 속에서 현대의 무심한 무신론적 합의에 대한 항의이며, 동시에 그로부터의 피난처다. 불가지론자 더글러스 머리의 말을 빌리자면, 리처드 도킨스가 “우리가 가진 신비를 해결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그리고 과학이 부분적으로 해결한 것도 사실이지만—문제는 우리가 해결된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제이컵 필립스의 그 당혹스러운 신부님에게 돌아가 보자.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세대적 자각의 표출.. 즉, 현대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해결된 존재처럼 느끼는 상태’, 혹은 최소한 ‘조금 덜 미해결된 존재처럼 느끼는 상태’를 향한 갈망이 표면화된 결과인지 모른다.
소음과 과시, 그리고 온갖 정체성의 향연 속에서도 현대는 그 감각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
반면 그 답은—신비롭고, 침묵 속에서, 영원한 방식으로—성당 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