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94] 형언할 수 없는 은사들
  • Hans Boersma Hans Boersma is the Saint Benedict Servants of Christ Professor in Ascetical Theology at Nashotah House Theological Seminary. 성 베네딕도 그리스도의 종들 석좌

  • 형언할 수 없는 은사에 대해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군가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에 칠면조를 가져온다면, 우리는 그 선물을 묘사하고 감사를 전할 말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감사합니다. 멜레아그리스(Meleagris) 과(科)에 속하며, 화려한 수컷은 부리 위에 늘어진 주름을 가졌고 덩치가 크고 땅 위에서 먹이를 찾는 조류를 가져오셨군요.” 칠면조라는 선물은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가져온 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은사, 즉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선물은, 정의상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의 경계를 초월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은사에 대해 어떻게 합당한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우리가 2코린토 9장에서 맞닥뜨리는 “감사의 수수께끼”이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그분의 은사에 감사하나이다!”(2코린 9,15)

    그러나 안타깝게도 감사의 부재는 흔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워하였다. 골짜기와 산 언덕의 시내와 샘, 밀과 보리,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올리브와 꿀, 모자람 없는 빵, 철이 나는 돌, 구리가 묻힌 산들(신명 8,7–9).

    모세는 이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 감사하라!” 너희를 광야를 지나오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다. 받은 은사들로 교만하게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너희 하느님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여라.”(8,11) “스스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하지 않도록 경계하여라”(8,17). 교만은 감사의 길을 가로막는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치유하셨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그는 흔히 말하는 “정기적으로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이방인 말고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온 이가 없단 말이냐?”(17,17–18) 사마리아인은 감사드렸지만, 나머지 이들의 방자함은 그들의 감사를 가로막았다.

    신명기 8장과 루카 17장은 모두 감사를 드려야 할 은사―약속의 땅과 질병에서의 치유―를 다룬다. 이 두 은사는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교회가 사용하는 일부 감사절 전례 독서는 이 둘을 함께 짝지어 읽도록 한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이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 끝에 받은 은사이며, 건강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만성적이며 전염성 질환을 견뎌낸 끝에 받은 은사이다.

    교회는 우리에게 광야의 고통과 나병의 비참함이 서로 유사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둘 다 때때로 우리의 삶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드는 악과 고난을 상징한다. 반대로 약속의 땅의 풍요와 병고에서 회복된 건강 역시 서로 유사하다. 둘 다 하느님의 영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새로운 생명을 상징한다. 신명기 8장과 루카 17장은 동일한 궤적, 동일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죄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모세는 약속의 땅이라는 하느님의 은사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말을 사용한다. 루카 역시 예수님의 치유의 은사를 이야기로 펼쳐낸다. 두 은사는 모두 표현 가능한 것이기에 많은 말로 설명된다. 그리고 설명 가능한 은사이기에, 이스라엘 백성과 나병환자들은 원칙적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다. 그들 모두가 그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은사는 단순한 약속의 땅을 넘어선다. 우리의 은사는 단지 육체적 건강만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는 그 모든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요청하며 말한다.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바오로는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음을 안다. 그들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느님은 바로 ‘관대하심 그 자체’이시다. 바오로는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은총을 넘치도록 베푸시는 분이시기에, 여러분이 모든 일에 언제나 넉넉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2코린 9,8–11). 하느님은 씨 뿌리는 이에게 씨를 주시고 먹을 빵을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자원을 공급하고 불려주시며, 우리의 의로움의 수확을 늘려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면에서 풍요롭게 하신다.

    코린토 신자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 준다면, 그들의 나눔은 ‘말로 표현 가능한 선물’이 될 것이다. 우리는 돈을 셀 수도 있고, 자루에 담아 필요한 이들에게 보낼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관대하심은 다르다. 하느님의 관대하심은 우리의 그것과 같지 않다. 하느님의 관대하심은 코린토 신자들의 그것보다도, 우리의 그것보다도 훨씬 위대하다. 하느님의 관대하심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언어를 초월한다.

    물론, 하느님의 관대하심은 약속의 땅이며, 새로운 육체이다. 그러나 땅과 육체라는 말은 그분 자신이신 ‘관대하심 그 자체’라는 더 크고 심오한 실재를 잠시나마 암시할 뿐이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한 이가 되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8,9). 이것이 하느님께서 얼마나 관대하신지를 보여준다. 그분은 우리가 부유해지도록 스스로 가난해지신다. 그분은 우리 하느님이 되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다.

    우리는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로!

    오늘은 추수감사절이다. 오늘 우리는 사도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와 함께 외친다.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은사에 감사하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말이 턱없이 부족함을 안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신이신 관대하심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은사는 주어지고 또 주어지는 은사다. 우리 또한 그분의 은사를 우리 주변의 이들에게 전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의 영광 안에서 관대하신 하느님을 뵈올 때, 우리는 더 이상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말이 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실재, 곧 형언할 수 없는 그 은사의 실체를 직접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2-01 07:14]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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