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97] 닉 푸엔테스와 리처드 하나니아의 이교주의
  • 베설 맥그루 Bethel McGrew writes the newsletter Further Up. 뉴스레터 기고가

  • 닉 푸엔테스의 인기는 일종의 방식으로, “포스트-기독교적 우파(post-Christian right)”가 기독교 우파를 대체하여 부상할 것이라는, 로스 다우댓이 자주 인용되는 불길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다.

    젊은 인터넷 방송인인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와 가톨릭 신앙을 고백한다고 말하지만, 그 정체성을 분명히 외피처럼 걸치고 있을 뿐이다. 다니엘 머호니는 그를 “새로운 이교적 우파”의 화신으로 정확히 규정하는데, 그는 노골적으로 전체주의자들을 숭배하며 스스로를 정치적 권력중개자로 자리매김하려는 과정에서 예수보다 니체에게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자유주의 성향의 분석가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이 실현된 듯한 장면이며, 여러 주류 매체들은 이 순간을 최대한 이용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몇몇 매체는 리처드 하나니아의 글을 인용했는데, 그는 푸엔테스가 보수주의의 자연스러운 말단을 구현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니아 자신도 악명 높은 ‘대안우파’의 진창 속에서 활동한 과거를 갖고 있으며, 이를 부인하고 스스로를 세련된 반(反)공화당 비평가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에서 그 과거에서 멀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와 푸엔테스는 여전히 공통점을 지닌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둘 다 세상을 이교적 눈으로 바라보고 이교적 논리로 분석한다. 그들의 정치적 프로젝트는 서로 충돌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포스트 기독교적—정확히 말하면 향수를 품은 프리 기독교적—비전은 공유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약자, 소외된 자, ‘불편한 존재들’을 특별히 돌봄으로써 이교적 이웃들과 자신을 구별하였다. 그들은 냉혹한 공리주의적 논리에 따라 살기를 거부했으며, 제국의 거름더미 위에 버려져 썩어가던 인간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길을 돌아가고는 했다. 바로 이러한 본능이 하나니아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남의 태아의 가치를 인정할 만큼 미친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공격한다. 그는 말하길, 친생명 운동이 선거에서 비인기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며, 사람들에게 그런 ‘미친’ 부류가 있다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이들이 다른 무엇을 할 능력이 있는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암시한다.

    이러한 “낮은 인간 자본”의 도덕성에 맞서, 하나니아는 “고유하고 내재적 가치를 지닌 ‘인간 생명’이라는 어떤 것에 대한 종교적 신념”의 부재라는 자신의 계몽된 무신앙을 내세운다. 일반적으로 하나니아는 보다 큰 선(善)을 위해 때때로 인간 희생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다운증후군 태아에서부터, 뇌의 대부분 없이 태어난 아기들, 거동이 불가능한 노약자들에 이르기까지.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약자가 강자를 지나치게 부담시키는 순간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는 “seamless-garment utilitarianism 무봉제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대한 비유)”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가 “스스로 돌볼 수 없는 피조물”에게 자원을 써야 한다면, 그는 “멍청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낭비하기보다는 공장식 축산을 개혁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그의 수사는, 자연에 역행하는 동정의 교의를 내세우며 보살핌을 요구한다고 기독교인들을 못마땅해한 하인리히 히믈러의 격분을 떠올리게 한다.

    푸엔테스는 선별적 낙태나 안락사를 공개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지만, 약함과 낮은 지능에 대한 유사한 뿌리 깊은 경멸을 드러낸다. 그는 “저지능 반유대주의”에 괴로워한다. 이는 반유대주의에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반유대주의 버전을 함께 멍청하게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슈퍼챗 기부를 받고서도 팔로워들을 조롱하며, 그들을 거의 혐오하는 듯 보인다. 누군가 그에게 북클럽을 열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너희 대부분은 책을 이해할 만큼 똑똑하지 못하니 의미 없다”고 답했다.

    하나니아는 이 'sadomasochistic 변태성욕'적 게임을 일종의 재미섞인 감탄으로 관찰한다. 푸엔테스는 자신이 “하느님 없는 이교도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그는 지극히 이 세상적 왕국을 꿈꾼다. 한 바이럴 트윗에서 그는 “백인들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회복한 것처럼 로마 제국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로마의 잃어버린 영광은 그의 반복적 주제이다.

    “히틀러의 탈신화화”의 중요성에 대한 독백에는 백인 남성들이 늘 로마 제국을 떠올린다는 밈이 끼워 넣어져 있는데, 푸엔테스는 실제로 진지하게 그렇다. 때로 그는 여기에 십자군이나 가톨릭 군주제에 관한 통합주의적 수사를 섞지만, 일관된 관심의 대상은 권력이다.

    푸엔테스의 성적 윤리에 관한 위선적인 행적은 가장 기괴한 형태로 드러난다. 그는 기독교 윤리를 겉으로만 강조하면서도 가장 타락한 성적 권력 환상에 탐닉한다. 포르노의 악영향을 설교하곤 곧바로 강간 만화를 유포한다. 그는 복종적인 여성이나 남성 파트너를 마음대로 다루는 상상을 즐기며, 때로는 소아성애적 뉘앙스를 띠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는 힘으로 정의를 세우고 어떤 구멍이든 상관없던 옛 이교도 제국에서 고위 지위의 남성이 되고 싶어 한다.

    따라서 대안우파 인물이던 알리 알렉산더가 포식적 동성 성행위로 신빙성 있는 고발을 받았을 때, 푸엔테스가 그를 축소하여 변호하려 든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좀 더 미묘한 방식으로 하나니아 역시 성적 이교주의의 변증자가 되는데, 범죄 행위의 경계선을 느슨하게 만들려는 듯한 암시를 던진다.

    그는 한 트윗에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제시하고 반응을 조사했다. “14세 소녀의 부모가 그녀를 제프리 엡스타인에게 뮤추얼 펀드 1천만 달러와 맞바꾼다면, 이것은 허용되어야 하는가?” 그는 이를 성별별로 반응을 알고 싶다며 올렸다. 이후 그는 이 사고실험에 혐오감을 표시한 이들의 반응을 조롱하며, 그들이 “특정 닉네임을 가지고 최신 휴대폰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진을 쓰고 있다”며 비웃었다. “도덕주의와 가설을 고려할 능력 부족은 하층계급의 특징이다”라고 그는 냉소한다.

    푸엔테스는 자신이 그 하층계급의 ‘민중적’ 목소리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그 역시 냉혹한 엘리트주의자의 비웃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예수 이름 남용을 벗겨내면, 그는 하나니아 못지않게 미국을 다시 이교화하려는 데 몰두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니아도 푸엔테스 못지않게 나치적 동조자이지만, 단지 사회적으로 좀 더 용인 가능한 나치 프로젝트의 일부 요소들을 되살리고 있을 뿐이다.

    루이즈 페리가 표현한 강력한 이미지를 떠올릴 만하다. 기독교는 어두운 숲 속에 조성된 공터와 같고, 그 숲은 세대를 통해 억제되어 온 이교주의를 상징한다. 그 공터를 유지하는 수고가 버려질 때, 숲은 잃어버렸던 영역을 되찾기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오직 좌편만, 혹은 오직 우편만 바라보며 자신이 모든 위협을 예견했다고 자만하지만, 사방에서 어두운 뿌리들이 뻗어나와 자기 자리를 주장하며 생명을 질식시키려 한다.

    페리가 말하듯 “심을 때가 있고, 도끼질할 때”가 있다.
    공터의 수호자들은 도끼를 들고 나서야 할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2-04 08:07]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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