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98] 신성모독죄의 귀환인가?
  • 칼 R. 트루먼 Carl R. Trueman is a professor of biblical and religious studies at Grove City College and a fellow at the 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 His most recent book is Crisis of Confidence. 윤리·공공정책센터(EPPC) 연구원

  • 미국에서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필자는 고국에 대한 미국 보수 논평가들의 ‘파국론’—예컨대 영국 NHS가 “죽음 패널”을 운영한다거나, 급진적 무슬림들이 샤리아 법을 강요하기 위해 영국 도시들을 점령했다는 등의 주장—에 편승하고 싶은 유혹을 억눌러 왔다.

    필자는 글로스터셔의 전원 지역에서 자랐고, 그곳에서는 펍에서 나오는 적당히 미지근한 맥주부터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에서 마주치는 익숙한 얼굴들까지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는 ‘영국의 종말’ 같은 선정적 헤드라인의 소재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필자는 이 ‘왕관을 쓴 섬’에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워졌다. 그레이엄 리네핸에 대한 터무니없으면서도 음험한 체포 사건에서부터 성지에서 가톨릭 단체의 촬영을 금지한 일에 이르기까지, 필자가 알던 잉글랜드는 사라지고 있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문화의 직물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던 사상과 신념들이 지금은 문화적 제도권의 모든 힘을 동원해 뿌리 뽑히고, 반대되고, 배척되고 있다. 그것도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는 언어를 입에 올리며 말이다. 관용이라는 언어는 불관용을 조장하고, 자유라는 언어는 억압을 촉진하며, 친절이라는 언어는 잔혹함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징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최근 다시 제기되는 신성모독(blasphemy) 법의 부활 논의다. 물론 이는 성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보주의의 ‘총애받는 사업들’에 반대하는 이들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목적에서다.

    영국은 오랜 신성모독법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관련법이 폐지된 것도 겨우 2008년이었다. 그런데 데이비드 쉽리는 ‘The Spectator’에서, 국가기소국(CPS)이 코란을 불태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항소로 뒤집은 사건에 대해, 그 뒤집힌 판결을 다시 항소하기로 결정했다고 지적했다. 그 근거는 이 불태움이 “모독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쉽리는 이를 슬그머니 신성모독법을 법적 판례로 정착시키려는 시도로 자연스럽게 해석한다.

    쉽리의 해석은 설득력을 가진다.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정부기관인 CPS가 ‘모독(desecra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충분히 그런 방향으로 읽힐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급진적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이슬람이 코란에 부여하는 거룩성 때문에 코란 소각이 불쾌한 모독 행위라고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CPS가 ‘진지한 무슬림들의 보루’인 것도 아니고, 무엇이 성스러워 모독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선택적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경우를 보자.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조롱했다고 해서 기소될 누군가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낙태와 안락사는 당연히 모독 행위에 해당한다. 살과 피, 즉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종이와 잉크를 파괴하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중대한 일이다.

    그러나 두 행위 모두 현재 영국 법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 모독이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은 법적 권리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왜 코란 소각만 특별한가? 쉽리는 이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글 전체의 분위기는 CPS가 무슬림 공동체, 또는 그중 가장 공격적인 세력을 의식하고 있다고 암시한다. 물론 코란 소각이 무슬림에게 모욕적이라는 점, 그리고 행위자가 이를 의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CPS가 코란을 특별히 신성하다고 여긴다거나, 이슬람 법 전통을 존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성(性)과 성정체성에 대한 정통 이슬람 입장은 영국의 정치·법 제도가 선호하는 방향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독’이라는 표현은 우연이 아니다. 코란 소각은 CPS를 이끄는 세속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모독’을 포함한다. 그들에게 이는 본질적 모독이 아니라, 상징적·맥락적 모독이다.

    코란 소각은—그것이 실제로 무례하고 폭력적이며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긴 하지만—잉글랜드 진보 엘리트들이 지니는 ‘새로운 신성(新聖)’, 즉 그들의 성스러운 ‘진보적 의례’를 의문에 부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코스크운이 불을 질렀다면, 영국의 진보 지도층도 똑같이 불을 지르고 있다. 다만 그들이 불태우고 싶어 하는 것은 과거의 자유를 기반으로 한 ‘지역의 신들’이다. 그 때문에 코란은 그들에게 하나의 ‘성서’가 된다. 종교적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이 영국의 이른바 기독교적 과거를 거부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CPS의 선택성과 모순은 이들이 어떠한 긍정적 비전도 갖고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정통 이슬람이든 급진 이슬람이든, 그 어느 버전의 이슬람이 제시하는 긍정적 전망조차도 아니다. 코란 소각 사건은 단지 반대파를 위축시키기 위한 도구로 유용할 뿐이다.

    같은 논리는, 서구 도시의 ‘안전한 공간’에서—하마스 통제 지역에서는 성적 행동 때문에 고문과 죽음에 직면할 이들이—친(親)하마스 시위에 참여하며 ‘연대’를 과시하는 일부 LGBTQ 활동가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은 서구의 자유와 법치가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서구가 대표해 온 가치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단순히 그것이 산산조각 나기를 원한다—어떠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여기에는 일관되고 건설적인 철학을 찾을 여지가 없다. 긍정적 비전이 없으며,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일종의 ‘Mephistophelean commitment (독일에서 기원한 악마를 상징)’만이 있을 뿐이다. 이 ‘유용한 바보들’에게는 “내 적의 적은 곧 내 친구”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이 진보적 정서는 자신이 과거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공허한 허무주의의 잔해 아래 묻어버리면서도, 스스로를 경건한 의로움으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교적 용어(모독, 거룩함 등)를 차용해 정반대의 목적을 강화하려 한다.

    마르크스는 산업 자본주의가 초래한 효과에 대해 “거룩한 것은 모두 세속화된다”고 말했다. 오늘날 영국 지배층의 진보 이데올로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들에게 사회가 진정 인정받기 위해서는, 과거에 ‘거룩하다’고 여겨졌던 것은 반드시 모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묘한 ‘잠행적 신성모독법’이 바로 그 사실을 웅변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2-05 07:47]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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