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뒤 사십 일째 되는 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한 산에서 남은 열한 제자들을 만나셨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당신께 주셨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여 만방의 민족들을 세례로 새롭게 하여 가르치도록 명하셨다.
모든 민족이 세상의 참된 임금이신 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까지 말이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모험이며, 동시에 벅차고 불가능해 보이는 소명이다. 그 열한 제자들을 격려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신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영어 번역은 원문의 단어 순서를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어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with you am).”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주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는 실로 중대하다.
우선 “나는 …이다(I am)”라는 선언을 보자.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을 “나는 존재하는 분이다(I am)”라고 계시하셨고, 구약 전체에서 이 표현의 변형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내가 바로 그다(I am he).” “나만이 하느님이다(I alone am God).”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바로 이 이스라엘 하느님의 이름을 당신 자신에게 취하신다. 사실 이것은 처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 반대자들을 향해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나는 존재한다(before Abraham was, I am)”라고 하심으로써 분노를 일으키셨다.
대사제가 “당신이 그 임금인가?”라고 묻자 예수님은 “그렇다, 나는 그러하다(I am)”라고 대답하신다. 요한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나는 …이다(I am)”라고 자신을 계시하신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빛이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포도나무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I am)”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그분은 제자들과 적대자들에게 당신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곧 창조주이자 주님이시며, 이제 육화하여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임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와 함께(with you)”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태오 복음의 서두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의 아들이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불릴 것이라고 알려준다. 마태오 복음의 결말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이름을 암시하시며 제자들에게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다.
“I with you am(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는 “I am(나는 존재한다)”와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을 하나로 결합한다.
적어도 이 약속은, 예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의 하느님, 엑소더스와 시나이의 하느님, 여호수아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그 “나는 …이다(I am)”의 하느님으로서, 제자들과 함께 걸으신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단어 배치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with you(너희와 함께)”를 문장의 마지막에 덧붙이는 부가적 요소로 취급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의 이름 한가운데 “너희와 함께”를 배치하신다. 즉, 임마누엘의 의미 자체를 당신의 신적 정체성 안에 포함시키신다.
이것 역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나는 존재한다(I am)”라고 하시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이도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다(I am your God).” “나는 이스라엘에게 아침 이슬이 되리라(I am morning dew to Israel).” “나는 예루살렘 둘레에 불의 성벽이 되리라(I am a wall of fire around Jerusalem).” 그분의 이름은 단순히 “나는 존재한다(I am)”가 아니라, “나는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느님이다.”
즉,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이름을 당신 이름에 더하신다. 마치 아버지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녀를 통해 드러내는 것과 같다. 예컨대, “도널드-배런의-아버지 트럼프”, “조지-조지 부시의 아버지”와 같은 방식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분(I with you am)”이 되기를 선택하셨고, “나 홀로 있는 I am”으로 존재하기를 거부하신다. 그분은 당신 백성의 하느님이 되지 않는다면, 아예 하느님이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것은 매우 대담한 신적 선택이다. 만일, 설령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아브라함의 하느님”께서 갑자기 아브라함을 버리신다면 어떠한가? 아브라함이 역사에서 사라진다면? 그것은 단지 아브라함 가문의 영광스러운 역사의 비극적 종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품과 신적 정체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즉,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당신 이름 안으로 가져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아브라함을 부정하실 수도 없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를 부정하실 수 없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씨가 역사 속에서 보존되고 확장되는 사실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I am the God of Abraham)”라고 불리시는 하느님의 실존과 신의 충실성을 증언한다. 교회가 세계 곳곳으로 증식하며 확장되는 현실은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with you am)”라고 하신 주님의 주권을 확증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파괴를 치유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아브라함에게는 땅,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와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이 약속되었다. 또한 모든 민족들이 그의 후손을 통해 축복받을 것이라 약속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당신 이름 안에 포함시키셨을 때, 그 약속들 또한 당신 정체성 안에 포함시키신 것이다. 곧,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창조를 회복시키실 하느님이다.”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신 셈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땅을 상속받고, 하늘의 별처럼 빛날 것이며, 세상의 모든 가문들을 축복할 것이다. 만약 이 약속이 실패한다면,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부정하는 셈이 되는데, 그분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의 선언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예수님의 말씀, “I with you am(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는 교회가 만방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베풀고, 그분이 명하신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이라는 그분의 개인적 서약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명예, 곧 “우리를 포함한 이름(name-that-includes-us)”을 걸고 당신이 약속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결론은 분명하다. 민족들은 제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참으로 하느님이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고, “I am”이 “I am”이신 것만큼이나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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