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다시금 예지력을 드러낸다. “심리학자들이 원한(ressentiment)을 가까이서 연구해보고 싶다면—이 잡초는 지금도 무정부주의자와 반유대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아름답게 꽃피고 있다. 언제나 그래왔듯 숨겨진 곳에서 말이다.”
오늘날 젊은 남성층이 정치적으로 우측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분명해지면서, 기존 보수운동 내에서는 새로운 불안이 커지고 있다. 최근 몇 주 동안 그것은 절정에 이르렀다. 바로 이른바 ‘그로이퍼 우파(Groyper Right)’의 부상 때문이다.
“그로이퍼”라는 단어는 이제 “나치”나 “파시스트” 수준의 새로운 논쟁적 딱지로 변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아직 특정한 의미를 약간이라도 지닌다면, 그것은 온라인 인플루언서 닉 푸엔테스(Nick Fuentes)의 신봉자, 지지 플랫폼 제공자, 혹은 그의 농담에 가끔 웃어주는 정도의 동조자 정도를 가리킨다. 그의 수많은 논점 가운데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 하나는 반유대주의이며 이것이 우려하는 비평가들이 가장 크게 문제 삼는 대목이다.
그러나 니체가 지적한 더 넓은 문제는, 오늘날 젊은 남성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정서적 병리이며, 푸엔테스나 반유대주의는 그 앞에서 단순한 부차적 현상에 불과하다. 근본 문제는 바로 원한(ressentiment)이다. 이는 인간의 권능의지(Will to Power)를 남성적 활동—건설, 정복, 영웅적 행위—에서 벗어나 비열한 암투나 뒤틀린 파괴 충동으로 몰아간다. 즉 어떤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그 붕괴 자체에서 열등한 만족을 얻으려는 충동이다.
니체는 유럽 문화에서 원한이 부상한 원인을 기독교 탓으로 돌렸다. 그는 이 힘의 기원을 사제적 권력 구조에서 찾았고, 그러한 구조는 고대 그리스에는 거의 없었지만, 그의 관점에서는 특히 고대 이스라엘에서 분명히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원한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며, 사회의 상태에 따라 증감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2권에서 정치적 감정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을 질투(phthonos)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질투란 “동료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일종의 고통… 그 성공을 통해 자신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남이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다. 질투는 신화적 규모의 파괴를 초래하는 감정이며, 테베의 비극(『페니키아 여인들』)에서 보듯 성읍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가톨릭 전통을 잇는 그리스도교 사상가, 예컨대 성 대 바실리오는 질투를 “최초의 죄”라고 보았다. 바로 이 질투가 사탄이 하느님께 반역하게 만든 동인이었다. 질투는 오늘 우리의 공동체도 찢어놓을 수 있는 위험한 감정이다.
남성들이 높은 수준의 원한을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지난 세대 동안 젊은 남성들은 수많은 기회에서 소외되었다. 그들은 공교육·사교육·혹은 이른바 “고전적 기독교 교육”을 받았든지 간에, 바로 그들을 남성답게 만드는 특성들이야말로 승진과 인정에 부적합하게 만든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예컨대 불편부당한 직언, 끓어오르는 에너지, 동료를 능가하려는 타고난 추진성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질투나 원한이 자라고 있다면, 무엇인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질투의 ‘악한 쌍둥이’에 대응하는 건설적 감정이 있다. 바로 제로스(zelos)다. 영어의 “zeal(열성)”의 뿌리가 되는 단어다. 제로스란 “다른 이에게 있는 선하고 명예로운 것을 보면서, 자신도 그것을 이룰 수 있음에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한 감정이며 고결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제로스는 인간을 위대한 대상에 도전하도록 자극하고, 기술과 성품을 단련하게 만들며, 경쟁을 통해 자기 탁월성을 추구하게 한다.
고대 시인 헤시오도스는 제로스를 신(神)으로 묘사하며, 그가 제우스의 폭군적 아버지 크로노스를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제로스는 경제적 생산성도 낳고, 예술의 최고 경지도 낳는다.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이웃은 이웃을 보고 제로스를 일으킨다. 부를 향해 서로를 재촉하니, 이런 다툼은 인간에게 선하다. 도공은 도공을 시기하고, 건축가는 건축가를 시기하며, 거지도 거지를 향해 끓어오르고, 시인도 시인을 겨룬다.”
제로스는 특히 위대한 영혼(magnanimity, 대인덕)의 특징이다. 이는 영웅을 향해 느끼는 감정이자,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키는 감정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로스의 전도자’였다. 그는 『영웅전』을 젊은 남성들에게 제로스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집필했다. 그의 저작은 그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두었고, 르네상스 이후 그리스도교 세계가 고대 영웅정신을 받아들이는 데 기초 텍스트가 되었다.
『영웅전』은 유럽 귀족 교육의 핵심 텍스트였고, 미국 식민지 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고전이었다. 『연방주의자 논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고전 텍스트도 바로 플루타르코스였다.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전』 서문에서, 과거의 영웅들에 대한 제로스는 도덕적 훈계가 없어도 인간을 본능적으로 탁월성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제로스는 자석처럼 개인, 집단, 국가 전체를 위대함이라는 이상에 정렬시키는 힘이다.
중세 그리스도교도 이미 ‘세속적 영웅’의 모범을 필요로 했다. 성인(聖人)의 초월적 성덕과는 구별되지만, 세속적 권위를 맡은 이들이 따라야 하는 영웅적 덕의 모범이 있었다. ‘구세(九世)의 영웅들(Nine Worthies)’—그리스도교 영웅 셋, 구약 영웅 셋, 이교 영웅 셋(헥토르·알렉산드로스·카이사르)—은 바로 그 모델이었다. 이는 기사도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후 수십 년 동안 우리의 교육과 문화는 점점 영웅에 대한 불신으로 변해갔다. 플루타르코스는 교과과정에서 사라졌고, 우리 스스로의 영웅을 기리는 일도 금기시되었다. 우리는 영웅의 문화를 잃었으며, 그것을 회복하는 데는 단순한 유행이나 밈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로스를 막는 힘을 경멸(kataphronesis)이라고 했다. 위대한 인물들을 가볍게 조롱하고 폄하하는 문화가 몇십 년 지속된 결과, 사회 전체가 경멸의 정서에 물들었다. 위대한 것에 대한 경멸은 결국 인간 본성,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로 이어진다.
제로스가 금지되면, 원한(ressentiment)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이의 번영을 보는 순간 인간은 선택의 길 위에 선다.
1. 그 번영을 따라잡으려 노력할 것(제로스)
2.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저들이 몰락하길 바라는 악의적 즐거움(질투·원한)
푸엔테스와 같은 인물은 이미 사회 곳곳에 고여 있는 원한의 표출일 뿐이다.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로스를 되살리고 영웅성을 기리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교육자·예술가·지성인·건설자 모두에게 과제이며, 동시에 젊은 영혼에게 관찰되고 있는 모든 성인 남성 모두의 과제다. 젊은이들은 조용히 묻고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젊은이들의 정당한 분노를 인정해야 한다. 현재 문화 질서에 대해 젊은 층, 특히 소외된 남성들이 느끼는 공격적 분노는 어느 정도 건전한 측면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감정을 언급한다. 바로 의분(義憤, indignation)이다.
의분이란 “부당하게 누리는 행운을 보며 느끼는 고통”이다. 그는 이것이 선한 인간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의분이 없다면, 장차 영웅이 될 사람도 악인이 번영하는 것을 내버려둔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불의를 바로잡을 책임을 지닌다.
우리도 위대한 영혼들의 유산에서 다시 힘을 길러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고된 하루의 끝에 장화를 벗고 “옛사람들의 궁정에 들어섰다”고 했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자신이 태어난 목적이던 영혼의 양식을 그곳에서 얻었다.
우리 역시 반(反)영웅적 합의의 수호자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투쟁하려 한다면, 때때로 앞서간 위대한 영혼들의 모범 속에서 다시금 지력을 얻어야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