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백악관은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SS)」을 발표했다. 이는 1986년 제정된 연방법에 따라 매년 수행되는 의무적 절차로, 행정부의 목표와 정책을 입법부가 인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해에는 이 문건이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올해 발표된 스물아홉 쪽 분량의 미국 전략 우선순위 개요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스의 분석 기사는 다음과 같은 부제를 달았다. “새로운 백악관 정책 문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오래도록 품어온 유럽 지도자들에 대한 경멸을 공식화한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제목도 비슷한 격앙된 어조였다. “미국, 새로운 안보정책에서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을 ‘악역’으로 규정하며 역사를 뒤집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문건을 “도널드 트럼프의 음울하고 일관성 없는 외교 전략”이라 일축했다.
어느 정도까지 이러한 소동은 익숙한 극본에 따른 것이다. 즉, “도널드 트럼프는 품위·법치·민주주의 및 세계의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한 위협”이라는 전제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내놓은 국가안보 문건 또한 그릇된 것이거나 그보다 더 나쁜 것이라는 판단은 거의 자명한 것처럼 여겨진다.
역사학자에서 선전가로 변신한 티모시 스나이더는 뉴욕타임스에서 이렇게 인용된다. 그는 평소의 “트럼프=히틀러” 프레임을 잠시 내려놓고 새로운 비난을 들고 나온다. 이 문건이 푸틴의 관점을 대변한다고 읽는 것이다. “미국의 국가안보 문건이 이제 러시아의 그것과 동일한 이념적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NSS의 여러 요소는 수십 년간 유지된 미국 정책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인도-태평양에서 해상교통의 자유 보장, 중국의 대만 장악 시도 억제, 중동 산유 공급을 외세가 지배하거나 교란하지 못하도록 방지, 미국의 기술적·금융적 우위 유지 등이 있다.
미국은 1853년 페리 제독이 일본 항구에 함대를 이끌고 들어간 이래 줄곧 태평양에서 해양 패권을 주장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에 개입해왔고, 대만 정책은 수십 년간 일관되어 왔다. 기술·금융 우위의 기반은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가 마련했다.
그러나 주류 논평가들은 이러한 연속성(그리고 남미·중미 정책의 뚜렷한 변화)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 대신 문건의 유럽에 관한 진단에만 집착하는데, 이는 매우 직설적이다.
NSS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대륙 유럽은 세계 경제력에서 상대적 쇠퇴를 겪고 있으며, 과도한 규제는 혁신을 질식시키고, 폴란드와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실상 군축 상태에 있으며, 많은 국가에서 집권 연정이 야당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 아래에는 뚜렷한 인구학적 현실과 문명적 무기력감이 놓여 있다. NSS는 “무슬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늦어도 수십 년 내에 일부 NATO 회원국은 ‘비(非)유럽계’가 다수가 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인구 변화는 NATO가 문명적 동맹으로서 지속 가능한지 여부를 근본적으로 흔든다. 그럼에도 유럽 엘리트들은 여전히 다문화 이데올로기와 글로벌리즘을 신봉한다. NSS는 매우 담백하게 말한다. 미국의 국가이익은 “유럽 각국 내부에서 유럽의 현 궤도에 맞서는 저항을 계발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일부 유럽 논평가들은 이를 신식민주의라 비난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설적 진술 속에는 단절보다 연속성이 더 많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가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입했고, 서독 기본법에는 미국의 규범이 반영되었으며, 냉전 종식 후에는 유럽연합(EU)의 부상을 장려했다.
미국의 ‘역사의 종말’식 글로벌리즘이 유럽의 의제를 주도했고, 미국은 다문화주의·무지개 깃발·‘다양성은 힘’이라는 유토피아를 수출했다. 2020년 ‘사랑의 여름’ 동안 유럽 수도들에서 벌어진 BLM 시위는 미국의 문화적 식민화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순응하지 않은 소수에게는 가혹한 결과가 따랐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오르반 빅토르다.
이번 분노는 유럽의 주권 침해 때문이 아니다. 사실 유럽은 이미 수십 년 전 미국에 군사적 자위권을 외주화함으로써 상당 부분 주권을 내주었다. 문제는 상징성이다. NSS가 유럽을 꾸짖는다는 것은 곧 냉전 이후의 프로젝트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고, 그 프로젝트는 미국 엘리트들이 주도했다. 따라서 유럽 비판은 곧 미국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이다.
NSS의 서문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인들을 겨냥한다. 문건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미국의 외교정책 엘리트들은 세계 전체에 대한 미국의 영구적 지배가 우리 국가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획은 헛된 꿈이었고, ‘영원한 전쟁들’ 속에서 수조 달러와 무수한 생명을 희생한 끝에 실패로 돌아갔다.
경제 영역에서도 같은 엘리트들—지금도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의 논조를 좌우하는 이들—이 다음과 같이 지적된다. “그들은 글로벌리즘과 이른바 ‘자유무역’에 잘못된, 파괴적인 베팅을 하였고, 그 결과 미국의 경제·군사적 우월성이 의존하는 중산층과 산업 기반을 텅 비게 만들었다.”
NSS는 국내정책을 다루지 않는데, 이는 목적상 타당하다. 그러나 유럽의 문명적 무기력과 잘못된 이민정책에 대한 직설적 언급은 미국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열린 무역을 밀어붙인 이들이 결국 열린 국경을 가져왔고, 미국의 대학과 문화기관들은 미국사의 과오를 사과하거나 심지어 정죄하는 이념들을 수용했다.
트럼프 집권 이전 이미 미국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문명적 자신감의 침식을 겪었고, DEI 감찰관들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이념적 위압 분위기를 만들었다.
간단히 말해, NSS에 대한 항의는 대중주의와 트럼프의 부상에 대한 오랜 통곡의 연장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상징적 압축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전쟁을 패배로 보고 최악의 상황을 최선으로 만들고자 한다. 트럼프의 비판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녹색전환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와 지지자들은 이를 실패, 즉 의미 있는 성과 없이 수조 달러를 쏟아부은 정책으로 본다. 반면 비판자들은 여전히 굳건한 신봉자들이다.
경제 글로벌리즘도 그렇다. 대중주의자들은 탈산업화, 중산층의 쇠퇴, 소수에게만 집중된 부라는 결과를 본다. 트럼프의 비판자들은 여전히 옛 질서의 신앙고백을 유지한다.
NSS는 지난 35년의 미국 외교정책을 평가하며 부족함을 지적한다. 영원한 전쟁들, 군대를 구성하지 못하는 ‘동맹들’, 실패한 민주주의 확산 정책 등.
NSS를 둘러싼 소동은 비판자들이 여전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고 냉전 이후 더욱 강화된 세계질서에 충성을 바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질서는 점차 기능 장애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트럼프 행정부의 접근 방식의 세부 사항을 두고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이 행정부가 실패한 합의로부터 결별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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