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07] 칠레 대선에서 공산주의에 맞서는 가톨릭 신자
  • 호세 이그나시오 팔마 José Ignacio Palma is a political scientist. He currently serves as a researcher at the think tank Ideas Republicanas. 정치학자

  • 2017년, 칠레 중도우파 진영을 대표하는 지도자 세바스티안 피녜라는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야권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큰 저항 없이 라 모네다(칠레 대통령궁)를 탈환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그의 지도력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 어떤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피녜라는 결국 승리했지만, 그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험난했다. 우파 내부에서 뜻밖의 경고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애국적 헌신과 가정을 믿습니다. … 또한 자유와 경쟁, 그리고 법치주의를 믿습니다. 보시다시피, 전혀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이 발언의 주인공은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였다. 그는 전통적 보수정당인 독립민주연합(UDI)을 탈당하면서, 해당 정당이 정치·경제·문화 전반에서 온건화, 곧 ‘피녜라화’의 길로 기울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피녜라의 첫 번째 정부(2010~2014)는 중도우파의 이념적 구조를 변화시켰고, R. R. 리노가 말한 바와 같은 ‘문화적 규제 해체’를 초래했다.

    한때 자유시장 역동성과 애국적 정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도덕 직관을 결합했던 운동은, 2017년에 이르러 기술관료적이고 세계시민적이며,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정치적·인간학적으로 ‘중립적인’ 무언가로 변모했다.

    그러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찰스 테일러, 패트릭 디닌이 각기 입증했듯이, 그러한 중립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인간의 선에 대한 비전이 결여된 공적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칠레의 중도우파는 인격, 공동체, 인간 번영에 대한 실질적 이해 없이도 안정적인 정치 프로젝트가 가능하다는 자유주의적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왔다. 그리고 리처드 존 노이하우스가 『벌거벗은 공적 광장』에서 경고했듯, 종교가 시민적 삶에서 추방될 때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분명히 진보주의적인 전투적 세속 신념체계이다.

    카스트는 이 점을 분명히 꿰뚫어 보았다. 그는 기초가 회복되지 않은 채 중도우파가 다시 집권한다면, 2011년 학생운동의 아이콘인 조르조 잭슨이나 가브리엘 보리치로 대표되는 진보 좌파가 곧 대통령직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일관된 정치철학을 결여한 채 출범한 피녜라의 두 번째 정부는 2019년 10월 봉기 속에서 와해되었고, 신좌파는 이를 교묘히 흡수하여 칠레 사회 불안의 ‘해석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프렌테 암플리오는 철학적 논쟁에서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공세를 강화했다. 그 영향 아래에서 ‘발전’, ‘삶의 질’, ‘존엄’, 심지어 ‘인권’이라는 말들마저 칠레의 문화적 유산과 전혀 무관한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공허한 그릇으로 변질되었다. 이는 그 기원과 충돌하는 인간학적 프로젝트가 그리스도교적 도덕 어휘를 전유하는 현상으로, 칼 트루먼이 말한 후기 근대성의 ‘도덕적 전도’—객관적 인간 본성을 대신하여 ‘심리적 자아’가 중심이 되는 현상—의 정확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칠레는 자신만의 ‘1968년 5월’을 경험했고, 진보 좌파는 이 혼란을 선거 승리로 번역해냈다. 2022년 3월 11일, 카스트의 예견대로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1968년의 격변 속에서 보수주의적 자각을 얻은 로저 스크러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0월 봉기는 반작용 또한 불러일으켰다. 지하철역 방화, 카라비네로스(칠레 경찰)에 대한 괴롭힘, 성당 방화는 단순한 전복을 넘어 허무주의적 분열을 드러냈다.

    한 낙서 이미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모독적으로 그려진 그리스도의 형상 위에 “그들을 용서하지 마라.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순간, 10월 운동은 문명화된 삶을 지탱하는 모든 문화적·제도적 기둥을 무너뜨리려는 가장 어두운 충동을 드러냈다.

    혁명적 열기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는 2021년 선거에서 강력한 후보로 남았으며 결선투표에서 4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칠레 보수주의의 재부상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카스트의 정치 강령은, 그의 말대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아홉 자녀를 둔 가톨릭 신자이자, 수정 순간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존엄을 일관되게 옹호하는 그는, 가톨릭 사회교리에 기초한 정치 비전을 제시하다 1991년 암살된 상원의원 하이메 구스만의 전통을 잇는 인물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인간에 대한 진리를 부정하는 사회는 결코 번영할 수 없다”고 강조했듯,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토대는 카스트의 프로젝트에 분명한 유기적 성격을 부여한다. 이는 기술관료적이거나 절차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도덕·문화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정치적 비전이며, 인간 번영에 대한 실질적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서구 세계 전반에서와 마찬가지로, 불법 이민의 급증과 국제 조직범죄의 유입은 진보 정부의 무능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법치주의, 국가 주권의 표현으로서의 국경, 시민적 자긍심의 원천으로서의 문화적 특수성을 강조한 카스트의 메시지는 전례 없는 공감을 얻었다.

    이 지점에서 칠레의 경험은 미국의 동시대 논쟁과 맞닿는다. 요람 하조니가 『민족주의의 미덕』에서 주장하듯, 국가는 억압적 허구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가 질서 있게 배열되고 우선순위가 정해지는 역사적 형식이다. 국경이 없으면 책임은 해체되고, 주권이 없으면 공동선은 불가능해진다. 칠레의 공화파는—매킨타이어가 강조했듯—현대 국가는 자유주의적 기술관료주의보다 훨씬 깊은 전통에 의지해야만, 충분히 많은 시민들의 애국적 헌신을 이끌어내고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인식했다.

    카스트의 이민 정책은 JD 밴스가 최근 언급한 ‘ordo amoris, 사랑의 질서’와 동일한 도덕적 명료성을 지닌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피에르 마낭이 ‘인류의 종교’라 부른 무정형의 인도주의가 아니라, 섭리적으로 주어진 가족·이웃·국가의 유대를 통해 질서 지워진 구체적 사랑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가르쳤듯, 질서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감상주의이며, 아무런 우선 없이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칠레의 경우, 공화파적 관점은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독재를 피해 도망쳐 온 이주민들의 존엄을 인정함과 동시에,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의 위계에 따라 자국 시민의 안전과 복지를 우선시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분명히 한다. 환대는 진실해야 하지만, 동시에 질서 정연해야 한다.

    중요하게도, 카스트의 정치 비전은 이민 문제를 훨씬 넘어선다. 새로운 칠레 우파는 공공질서에 대한 진보 정부의 실패에 대한 반작용일 뿐만 아니라, 공동선에 대한 총체적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 중도우파에 대한 거부로 등장했다. 카스트와 그의 운동에게 공공 안전과 출산율 하락을 동시에 다루는 것은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사회적 평화는 가정생활의 전제조건이며, 가정은 영적·시민적 형성의 1차적 장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크리스토퍼 라쉬의 『엘리트의 반란』에 담긴 통찰은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가족과 지역 공동체는 전근대의 잔재가 아니라, 기술관료적 근대성이 초래한 원자화와 정서적 해체에 맞서는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방벽이다.

    2025년, 카스트의 프로젝트는 결정적 시험대에 올랐다. 세 번째 대선 도전에서 그는 다시 결선투표에 진출했으며, 이번에는 선두 주자다. 그의 상대는 칠레 공산당 소속의 헤네트 하라이다. 이는 전례 없는 일이다. 창당 103년 역사상, 공산당이 자당 소속 후보를 대통령 결선에 진출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결코 사소한 사실이 아니다. 칠레 공산주의는 유럽식으로 완화된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쿠바·니카라과·베네수엘라와의 이념적 연계를 단절한 적 없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하라는 당과 거리를 두려 하며 탈당 가능성까지 시사했지만, 평생을 그 내부에서 형성된 이력이 그러한 제스처의 신빙성을 약화시킨다. 더 나아가, 현 정부에서 공공질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전력, 그리고 2019년 봉기 이후 격동기 동안 카라비네로스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해 온 이력은 그녀의 기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이는 반경찰 정서를 상징하는 ‘페로 마타파코스(Perro Matapacos)’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 널리 퍼지며 상징화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카스트의 승산은 크다. 하라가 1차 투표에서 26.85%로 1위를 차지했지만, 카스트(23.92%), 요하네스 카이저(13.94%), 에블린 마테이(12.47%), 그리고 프랑코 파리시의 상당한 지지층(19.71%)을 합하면, 공화파 후보에게 유리한 구도가 형성된다.

    이 승리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한때 서구 자유주의 합의의 성공 사례로 찬사를 받았던 칠레는 이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인간학이 맞붙는 시험장이 되었다. 하나는 가정, 공동체, 국가, 질서, 초월을 긍정하는 비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를 주관적 욕망으로, 공동선을 문화 권력의 재분배로 환원하는 비전이다. 이 대결 속에서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는 단순한 국내 정치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미국의 JD 밴스와 궤를 같이하는 더 넓은 정치적·영적 재정렬의 징표로 서 있다.

    그가 승리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 답은—카스트 자신이 말하듯—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2-14 08:00]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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