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12] 벨제츠에서 본다이까지
  • 캐서린 스피라 Katherine Spira is a neurologist and native of Sydney, Australia. 호주 시드니 신경과 전문의

  •   <벨제츠(Belzec) : 나치 독일이 폴란드 남동부(루블린 주)에 설치한 유대인 절멸 수용소>

    10월 말, 가족과 함께한 폴란드 여행을 마치고 시드니로 돌아온 경험은 나를 깊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왔음에도, 나는 처음으로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폴란드는 분명 내 가족이 뿌리를 둔 곳이었지만, 더 이상 우리 가족의 집은 아니었다. 공항에서 아파트로 가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 나는 익숙하게 알고 있던 시드니의 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빛은 더 이상 나를 따뜻하게 해주지 않았다. 내가 알고 지내던 건물과 광고판, 도로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것들은 나와 깊이 분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소속되지 못한다’는 불편함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시드니에서의 삶은 피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슬픔은 너무도 만연해 있었기에, 여전히 가족과 일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혹시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한 친구는 내 여행이 ‘세대 간 트라우마’를 활성화시킨 것 같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홀로코스트 동안 할머니가 지나온 여정을 되짚었고, 그녀가 숨어 지냈던 장소를 방문했으며, 내 가족 수십 명과 또 다른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유해가 뒤섞인 재가 내 발바닥 아래 놓여 있던 열린 장소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나는, 나의 ‘세대 간 트라우마’가 내가 다녀온 장소보다도, 내가 돌아온 장소에 의해 더 크게 자극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호주에서의 일상 속에서 2년간 지속적으로 노출된 반유대주의는, 나의 안전감과 자유,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조금씩 침식시켜 왔다.

    나는 여권이 발급된 나라, 늘 자부심을 가지고 사랑해 왔던 곳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은 더 이상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적인 정신 건강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 바깥에 실재하는 어떤 것,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요일 오후, 우리는 본다이 정션에 있는 여동생 집에서 하누카 첫날 밤을 맞아 촛불을 밝혔다. 그날은 여섯 살이 된 조카의 생일 파티이기도 했다. 어린 소녀들은 빛과 기적에 관한 기도와 노래를 함께 불렀다. 생일을 맞은 아이가 축제의 불빛을 밝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을 느꼈다.

    이후 차로 향하던 중, 나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두세 대의 긴급 차량이 한 블록 떨어진 거리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일곱 살과 아홉 살인 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길 건너편에 있던 딸기빛 머리의 아일랜드계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이들을 어디로 데려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말했다. “해변 쪽으로는 가지 마세요. 총격범이 있습니다." 아홉 살 딸은 몸을 떨었고, 일곱 살 딸은 “무서워”라고 말했다.

    차에 타자마자, 나는 연이어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다.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 당국이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는 몇 시간이 걸릴 소식이었다. 총격의 표적은 바로 본다이 해변에서 열리던 하누카 축제였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세인트 빈센트 병원 방향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반대편 차선으로 두 대의 구급차와 검은 경찰 지프, 그리고 표시 없는 흰 SUV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딸들의 아버지에게 음성으로 문자를 보내, 우리가 무사하며 예정대로 그에게 가고 있다고 알렸다. 센테니얼 파크 쪽으로 코너를 돌자, 이번에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 병원 쪽에서 또 다른 구급차들이 반대 방향으로 질주해 갔다.

    전 남편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그날 오후 본다이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역시 무사하며, 우리보다 조금 늦게 집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집 근처에 차를 세웠을 때, 유대인 요양원 밖에 서 있던 경비 인원의 수가 눈앞에서 네 배로 늘어났다. 자원봉사 경비원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제복 셔츠를 입으며 각자의 위치로 급히 달려갔다.

    전 남편이 도착한 뒤, 그는 참담한 소식을 확인해 주었다. 이번 총격은 분명 반유대주의적 공격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딸들은 밖에 있는 악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모든 창문과 문을 잠그고 싶어 했다.

    나는 딸들을 꼭 껴안았고, 그들과 함께 촛불을 다시 한 번 밝혔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이 어떠하든, 우리가 누구인지를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며, 누가 우리를 두렵게 하려 하더라도 결코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다음 날, 나는 예약이 가득 찬 진료실에서 겨우 하루를 버텼다. 내 안에서는 깊은 슬픔과 함께, 단절감과 부정의 섬뜩한 파편들이 뒤섞여 일렁였지만, 나는 환자들에게 집중하려 애썼다. 저녁 8시쯤, 그 불협화음을 더는 견딜 수 없어 차에 올라 본다이 해변으로 향했다.

    남쪽에서 접근하자, 캠벨 퍼레이드는 첫 번째 로터리에서부터 통제되고 있었다. 늘 붐비던 상점들과 식당들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벼운 이슬비를 안개처럼 흩뿌리고 있었다.

    나는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 물가로 향했고, 이어 산책로를 따라 해변 산책로로 걸어갔다. 예전에 밤에 이곳에 내려왔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모래사장에서 친구와 나누던 대화, 달빛 아래에서의 키스, 쓸모없는 우산 하나를 함께 쓰며 비를 맞고 차로 달려가던 아이들과의 기억들. 그러나 그때 느꼈던 평온을 나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오늘 밤 내가 본다이 해변을 찾은 것은 이 장소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또 다른 이유였다. 그것은 내가 폴란드에 갔던 이유와 같았다. 일어난 악, 바로 동일한 그 악을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나는 인명구조대 탑 옆에 설치된 경찰 통제선으로 다가갔다. 전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나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소지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치타월, 슬리퍼, 뒤에 아기용 좌석과 두 개의 헬멧이 달린 자전거. 통제선 가까이에는 분실물로 가득 찬 통들이 놓여 있었다. 신발들, 접힌 유모차, 해변 가방들. 악의 손길과 소지품 더미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경찰선 옆에는 꽃과 촛불이 놓여 있었다. 후드티와 반바지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검은색 근무복 차림으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모를 떨림 속에서 나는 기도했다.

    수없이 걸어 다녔던 그 길을 따라 다시 도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풍경은 두 달 전 내가 걸었던 기억의 길로 변해 갔다. 벨제츠 죽음의 수용소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던 그 추모의 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 집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2-19 08:26]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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