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초, 이집트 종교기금부는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다. 제목은 「당신의 개념을 바로잡으라(Correct Your Concepts)」였다. 정부가 어떤 인식들을 ‘바로잡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지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가장 어린 시청자들조차 끌어들이도록 설계된 온라인 광고와 영상들은 가능한 한 단순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컨대 한 광고에서는 길거리에서 떠돌이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며 복되게 미소 짓는 청년이 등장하고, 이어서 몽둥이로 고양이를 때리려 하며 사납게 찡그린 또 다른 남자가 나온다. 전자에게는 초록색 체크 표시가, 후자에게는 커다란 빨간 X 표시가 붙는다.
이 캠페인이 배척해야 할 행위로 열거한 목록에는 동물 학대뿐 아니라 흡연, 전자담배, 시험에서의 부정행위, 온라인 음란물 소비, 소셜미디어에 과도한 시간 소비, 아동 체벌, 물 낭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상당히 광범위한 목록이다. 그리고 정부는 이 문제의 ‘대가’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국민들에게 경고한다. 캠페인의 한 구호는 진지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당신이 잘못된 것을 보거나 행할 때마다, 당신 마음속의 빛이 꺼진다.”
미국의 관찰자들이 카이로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 역시 바로잡아야 할 인식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최근 시에나(Siena)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전체의 22%, 그리고 18세에서 49세 사이 남성의 무려 절반이 정기적으로 온라인 도박에 빠져 있다.
전체 인구의 3분의 2, 그리고 가슴 아프게도 청소년의 4분의 3이 정기적으로 음란물을 시청한다. 우리는 약물에 취하고, 온라인에 독설 가득한 글을 올리며, 점점 더 폭력이 불가피한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다. 최근 NPR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30%가 바로 그런 생각을 밝혔다.
그렇다면 이제 이집트의 선례를 따라, 워싱턴이 악덕을 소멸시키는 국가적 캠페인에 나서야 할 때일까?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이 발상은 터무니없이 들릴 것이다. 정부에 대한 전반적 신뢰는 지난 70년간 최저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우리가 공무원들에게 쓰레기 수거조차 제대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하물며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치유해 달라고 기대할 리는 더더욱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부 개입이 도덕적 부흥을 이끌어 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데 대부분 동의하더라도,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 대가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수십 년에 걸친 연구는, 사회적 병폐 가운데 하나만 집어 들자면 음란물이 뇌를 변화시키고 의존성을 만들어내며, 상습적 소비자들을 다른 인간과의 건강한 성적 관계에 참여할 가능성이 훨씬 낮은 상태로 만든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올해 우리나라 출산율이 사상 최저치에 도달했다고 밝힌 이유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째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수많은 학자들의 몫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기술관료들이 내놓는 빠르고 손쉬운 해법을 기대하고 있다면, 애초에 희망을 접는 편이 낫다. 우리는 정치와 정책이라는 빈약한 도구로 거대한 영적 위기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음란물에 중독되고, 약에 취하며, 도박에 빠진 국민이 되었다.
예컨대 젊은이들의 파괴적인 음란물 의존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최근 수십 년간 이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선의와 진정성을 지닌 사상가들과 입법자들은 거의 같은 답을 내놓았다. “금지하자.” 그러면 어김없이 표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나, 우리 화면을 범람하는 외설을 ‘보호받아야 할 표현’으로 옹호했다. 어느새 논쟁은 공적 광장이 아니라 법학전문대학원 세미나실에 더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온라인 도박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논쟁은 대개 2018년, 판결 하나로 팬듀얼 같은 거대 베팅 기업들이 기업가치 310억 달러로 도약할 수 있게 만든 연방대법원 판결에서 시작해, 거기서 끝나곤 한다.
오해는 말라. 법적 정교함과 정책적 세공에도 나름의 자리는 있다. 그러나 입법에 관한 이러한 논의에서 빠져 있는 것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인정이다. 우리는 스포츠 도박을 하거나, 낯선 이들의 성행위를 구경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집트 형제들이 옳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당신 마음속의 빛이 꺼지기 때문이다. 그 빛은 한 번 꺼지면 다시 켜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빛이 없이는, 우리는 더 이상 인간답게 식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옳고 그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를 이토록 꺼리는가? 작가 애런 렌이 상기시키듯, 우리가 이제 ‘부정적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대-그리스도교적 가치가 문화를 형성하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 그러한 가치들은 억압적이고, 퇴행적이며, 해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 결과 부모와 교사, 성직자들은 넘쳐나는 유혹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모든 도덕적 권위를 박탈하려 드는 시대정신과도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어떤 이들은 저항했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은 어깨를 으쓱하고 물러났다. 이것이 아마도, 절제된 학문적 어조로 말하고 글을 쓰는 캐나다 출신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 같은 인물이, 단지 “매일 아침 침대를 정리하라”고 조언했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적 센세이션이 된 이유일 것이다. 그는 한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연하게 가르치던 것들을 담담하게 말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곤경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 젊은이들이 자기파괴적 행위를 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그렇게 하라고 말해주면 된다. 침대를 정리하라. 음란물을 보지 말라. 팬듀얼 앱을 삭제하라. 휴대전화에 쓰는 시간을 줄이고, 성당이나 회당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려라. 왜냐하면 당신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직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해법은 우스울 만큼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복잡하지 않으며, 우리가 주변에서 목도하는 모든 사실은 직접적인 접근이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이른바 ‘그로이퍼(groypers)’—온라인 선동가 닉 푸엔테스의 추종자들—를 보라.
그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스탈린에 대한 그의 사랑 고백을 즐긴다. 그들이 이런 광적인 견해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젊은 백인 남성들에게, 그들과 KKK 사이에는 침대 시트 한 장 차이밖에 없다고 말해 왔다면, 결국 그들은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분노에 휩싸여, 거친 언사와 문화적 우월을 약속하는 첫 사기꾼에게 충성을 맹세할 준비가 될 것이다.
푸엔테스의 영향력을 한탄하기보다는, 그가 오히려 하나의 길을 드러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악의적이고 추잡한 세계관조차 이렇게 빠르게 추종자를 모을 수 있다면, 제대로 증폭된 하느님의 말씀은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을 이끌 수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이며, 이는 곧 더 단단한 도덕적 척추를 찾는 문제다. 사회에서 길을 잃은 소년, 소녀들은, 친근해 보이려는 판매원이나, 통계를 인용하는 학자나, 공허한 상투어를 늘어놓는 정치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 이야기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할 때는 단호하고 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성숙한 어른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이다. 그리고 그런 어른을 찾지 못할 때, 그들은 차선책으로 달려간다. 집을 불태우라고 부추기면서, 그렇게 하면 결국 노숙자가 된다는 사실은 결코 말해주지 않는 하찮은 선동가들에게로.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는 접근이 효과가 없다고 의심한다면, 맨해튼 5번가를 한번 걸어보라. 50번가와 51번가 사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 패트릭 대성당이 있다. 그 초석은 1842년부터 1864년 사망할 때까지 뉴욕 대교구장이었던 존 휴즈 대주교가 놓았다.
‘대거 존’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휴즈는, 기근에 시달리던 아일랜드에서 막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 신자들이 모든 희망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는 그들을 위해 싸웠다.전설에 따르면, 때로는 몸으로 싸움판에 뛰어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싸우는 가운데, 그는 개인적 책임과 절제를 강조하는 엄격한 복음을 설교했다.
한 세대가 지나자, 매춘부와 소매치기를 양산하는 집단으로 알려졌던 이 인구는 교사와 경찰, 지역사회의 지도자들을 도시에게 내어주었다. 한 전기 작가는 대거 존이 “신자들을 다시 영적으로 세웠다”고 평했다. 값싼 감동의 구호나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서 만나기”가 아니라, 분명한 가르침으로 말이다. 옳은 일을 행하고, 그른 것을 피하라. 그는 신자들에게 도덕적 목적의식을 심어주었고, 그 덕분에 그들은 자신을 모욕의 총합보다 더 큰 존재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랑이 깊은 만큼 엄격하고, 섬기는 이들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성장과 변화를 요구할 줄 아는 ‘대거 존’과 ‘대거 제인’을 수십 명 더 내어놓자.
오늘날의 탈선한 아이들—그중 일부는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을 부모처럼 돌보자. 명확하고 단호한 도덕적 가르침을 준다면, 그들은 불안을 정치적 퍼포먼스로 바꾸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와 기술은 변했을지 모르나, 인간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한 손길이다. 때로는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때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밀어주는 손길 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