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2월 23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에게 성탄 전야에 창가에 불 밝힌 촛불을 놓아 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불과 나흘 전인 12월 13일,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자신과 가족을 위해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며 탈출한 로물드 스파소프스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날은 “선의의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를 기리는 이 계절에 기억할 만한 하나의 미국적 전통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1970년대 냉전 시기의 망명에는 러시아 출신의 소련 체스 그랜드마스터 레프 알부르트,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운동선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트비아 출신의 발레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78년에는 당시 유엔 사무차장이었던 아르카디 셰브첸코가 수년간 CIA를 위해 활동한 끝에 망명하여, 소련 외교관 가운데 최고위급 탈출자가 되었다. 그러나 스파소프스키는 달랐다. 그는 폴란드의 주미 대사였다. 폴란드 외무부 차관을 지낸 뒤 두 번째로 미국 대사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그의 부친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로서 사후 바르샤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거리 이름으로 기려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철의 장막 너머에서 탈출한 비(非)소련권 공산주의 국가 최고위 관료였던 것이다.
스파소프스키는 조용히 떠나지 않았다. 1981년 12월 20일 미 국무부에서 자신의 망명을 발표하는 연설에서 그는 군사적 탄압을 이렇게 규정했다. “이는 폴란드에 강요된 전쟁 상태입니다. 곧 폴란드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입니다. …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계엄령의 “잔혹성과 비인간성”에 저항하는 이들과 연대를 선언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연대노조(Solidarity)의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 레흐 바웬사가 체포되어 강제로 구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저는 이 결정을 내렸습니다.” 폴란드의 연대노조는 공산 정권에 맞선 독립 노동조합 운동이었다.
자국민을 향한 공산 폴란드의 탄압은 일본 주재 폴란드 대사의 망명도 촉발했다. 성탄 전야, 도쿄의 미 대사관에서 즈지스와프 루라시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같은 해 5월, 그는 이미 연대노조 대표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한 바웬사를 공식적으로 환영한 바 있었다. 루라시는 자신의 망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가 국민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상황에서 봉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어 미국을 선택한 이유를, “자유로운 나라에서 ‘배신적인 폴란드 군사 정권’과, 크렘린 벽 뒤에서 이 모든 비극을 조종하는 진짜 책임자에 맞서 투쟁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두 명의 망명 외교관 모두 한때는 흠잡을 데 없는 공산당 경력을 지닌 헌신적 공산주의자였다. 두 사람 모두 공산당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도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강인한 아내들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폴란드의 자유로운 미래를 바라는 자녀들의 아버지였다.
스파소프스키가 인도 주재 대사로 재직하던 시절, 공산주의를 거부한 그의 열아홉 살 아들은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당시 인구 약 3,600만 명 가운데 1,0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국민과 함께 스파소프스키의 딸과 사위 역시 연대노조에 참여했다.
1980년 연대노조의 탄생은—서방 외교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자유의 경험과 함께—스파소프스키와 루라시가 의식적으로 공산주의를 부정하고 망명을 결단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1982년, 두 사람은 옛 정권으로부터 궐석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외교관들은 계엄령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것은 폴란드 국민을 향한 전쟁 선포였다. 계엄령은 본래도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개인의 권리, 법치, 제한된 정부를 애초에 허용한 적이 없는 전체주의 체제가 행사할 때 그것은 더욱 심각한 부정의였다. 그리고 상황은 더 악화될 수도 있었다. 소련 전차들은 연대노조와 그들이 불러일으킨 자유의 싹을 짓밟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서방과 동방 모두에서 많은 이들은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이 재현될 것이라 예상했다.
레이건은 이 순간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스파소프스키의 개인적 요청에 따라 그는 백악관 2층 식당 창가에 불 밝힌 촛불을 놓았다. 그리고 그는 미국과 전 세계를 향해 연설했다.
베들레헴의 별이 알린 “약속된 평화의 왕자”,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의 반영”인 성탄 트리, “유다인들의 하누카 축제를 상징하는 메노라”, 그리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미국의 하늘을 밝히는 “신앙과 자유라는 두 개의 등불”에 이르기까지—어둠에 맞선 빛의 이미지로 가득 찬 백악관 집무실 연설에서 그는 성탄 전야에 창가에 촛불을 켜 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폴란드 국민과의 연대를 보여 주는 작지만 확실한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문제의 뿌리는 언제나 공산 정권이었다. 폴란드의 정권과 그 배후의 소련 모두가 그러했다. 레이건은 자유를 언제나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자연적이며 양도 불가능한 권리,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언어로 설명했다. 그의 관점에서 미국인들은 축복받은 동시에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미국 가정에서 타오르는 수백만 개의 촛불이 자유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임을 알리게 하십시오.”
당시 기록된 레이건의 일기들은 그의 세계관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증언한다. 그는 계엄령 선포 이전부터 폴란드의 상황을 주시했고, 12월 14일에는 이렇게 적었다. “폴란드 문제로 교황에게 전화함. 우리의 우려와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함.”
스파소프스키의 극적인 망명 직전, 레이건의 숨 가쁜 일정에는 교황청 국무원장과의 오찬, 그리고 폴란드 사태를 다룬 국가안보회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그 회의에서 “동유럽에 대한 소련 제국의 식민 정책에 변화가 생길 수 있는, 우리 생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미 “힘을 통한 평화”에 헌신하고 있던 그는, 폴란드 국민에 대한 탄압과 함께 연대노조, 외교관 망명자들, 그리고 폴란드 출신 교황이 만들어 내는 기회의 교차점을 냉전 전략의 핵심에 두고 있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역시 이 순간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국제적으로 존경받던 그는, 1979년 여름 고국을 아홉 날 동안 순례하며 폴란드 국민을 격려하고 연대노조의 탄생에 불씨를 지핀 당사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철의 장막에 난 이 첫 번째 중대한 균열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폴란드 계엄령 전후로 그는 공개 성명과 비공개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 1981년 12월 24일 오후 6시 30분, 말 없는 그러나 강력한 메시지로서 바티칸 창가에 촛불을 밝혔다.
수백만의 미국인들과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대통령과 교황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날 밤, 긴 여정을 마치고 밤 11시경 덜레스 공항에 무사히 도착한 즈지스와프 루라시와 그의 가족은 워싱턴 D.C.로 향하는 길에서 수많은 가정 창가에 밝혀진 촛불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번 성탄절에도 창가에 촛불을 밝혀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 가운데 한 인물은 분명 레이건의 마음에 깊이 와닿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지미 라이다. 그는 지난 5년간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홍콩 당국에 의해, 가장 가혹한 독방 수감 상태로 억류되어 있다.
지난주 78세의 라이에게 내려진 855쪽 분량의 “유죄” 판결은 전형적인 공개 재판의 결과였으며, 어둠에 맞서기 위해 빛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다시 한 번 증명한다. 레이건은 라이를 홍콩인들, 더 나아가 중국인들, 그리고 억압받는 모든 땅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의 상징으로 보았을 것이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선의의 사람들에게 평화.”
그리고 촛불을 계속 켜십시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