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21] 뉴욕의 미소 짓는 대주교
  • 레이먼드 J. 드 수자 Fr. Raymond J. de Souza is a Senior Fellow at Cardus. 선임연구원

  • 16년 전, 뉴욕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거행된 그의 착좌 미사 당일 아침, 언제나 그렇듯 활달했던(그렇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티머시 돌런 대주교는 언제나처럼 큰 목소리로 필자를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강론이 마음에 들 겁니다. 리처드를 언급하거든요!”

    리처드 존 노이하우스 신부는 2009년 1월에 선종했다. 돌런의 뉴욕 대주교 임명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고, 공식 취임은 4월이었다. 두 사람이 뉴욕에서 함께 활동할 시간이 겹치지 않았다는 점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돌런은, 당시 루터교 목사였던 노이하우스가 1987년 동명의 저서에서 말한 이른바 ‘가톨릭의 순간’을 2010년대와 2020년대로 연장해 준 인물이었다. 1984년에 출간되어 널리 호평을 받은 『공적 영역의 벌거벗음(The Naked Public Square)』을 통해 노이하우스는 이미 미국을 대표하는 종교 지성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자주 협력했던 마이클 노박은 『가톨릭의 순간』에 대해, 노이하우스가 “미국 공적 영역에서 종교적 지도력의 공백”을 진단하고, “미국적 실험을 쇄신하는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가 그 고유한 역량을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실질적 공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고 썼다.

    노이하우스는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주류 개신교 교단들의 단순화된 정치에 빠지지 말고”, 대신 “이성적 권위와 실천적 지혜라는, 복음주의 교회들에는 아직 상응하는 전통이 없는 가톨릭 고유의 성숙한 지적 전통에 의존할 것”을 촉구했다.

    1980년대 후반은 가톨릭적 자신감이 고양되던 시기였다. 노이하우스는 뉴욕의 존 오코너 추기경을, 로마의 성 요한 바오로 2세 다음으로 존경했다. 노박은 『퍼스트 씽스』가 창간되기 전, 『크라이시스』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었고, 훗날 1990년대에 요한 바오로 2세 사상의 핵심 해설자가 될 메리 앤 글렌던과 조지 바이겔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바이겔이 1999년 권위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전기 『희망의 증인(Witness to Hope)』을 집필할 무렵, 노이하우스 신부는 이미 로마를 자주 오가는 인물이 되었고, 북미 교황청 대학에 머물며—당시 학장이 몬시뇰 티머시 돌런이었다—교황 관저에서의 만찬에 초대받기도 했다.

    2002년 성직자 성학대 스캔들이 터진 이후, 노이하우스 신부는 다시 ‘가톨릭의 순간’이라는 주제로 돌아왔다. 사제들의 죄와 범죄로 인한 수치 속에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었을까? 2003년 그는 이 개념을 보다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며, 1980년대의 낙관주의와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힘 있는 주교적 증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차이를 여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는 신앙의 충만함을 가르칠 수 있는 주교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라고 그는 썼다.
    “30년이 넘는 혼란과 논쟁, 그리고 진지한 이들에게는 이미 식상해진 갈등을 지나, 우리는 이제 진정으로 공의회를 받아들일 문턱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 그렇다면 지금 번성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번성할 가톨릭 신앙은, 신빙성 있고 생동감 넘치는 참으로 가톨릭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노이하우스 신부가 더 오래 살았다면, 오코너 추기경과 그랬던 것처럼 돌런과도 이 사명에서 동역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지난주 은퇴를 맞은 돌런은 흔히 ‘범상치 않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가 1980년대에 오코너를 맞으며 뉴욕을 “세계의 수도”라고 불렀던 도시에서라면, 그 정도의 존재감은 오히려 당연한 기대일지도 모른다.

    오코너가 뉴욕 대주교였던 시절(1984–2000), 유대인 시장이었던 에드 코크는 성탄 자정 미사에 참석하곤 했다. 때로는 충돌하기도 했던 두 사람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동의 관심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각하와 시장님』이라는 책을 함께 쓰기도 했다.

    돌런 재임 기간의 뉴욕 시장은 마이클 블룸버그, 빌 드블라지오, 에릭 애덤스였다. 애덤스는 이번 주 돌런의 마지막 자정 미사에 참석했지만, 그의 이름을 딴 다리가 세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이들이 추기경과 책을 공동 집필하거나 정책적으로 깊이 협력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은 직위에 비해 작았다.

    돌런은 1950년대 세인트루이스 교외의 가톨릭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1970년대 교회 내부의 혼란과 갈등을 직접 겪었다. 그러나 그를 결정적으로 형성한 것은 1980년대의 분위기였다. 그는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 워싱턴에 있었고, 이후 미국 가톨릭사를 주제로 박사 과정을 밟았다. 레이건 시대 말기에는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와 교황청 대사관에서 5년간 근무했다.

    미국사를 열정적으로 읽던 그는 레이건에 관한 책이라면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진지한 역사가였던 그는, 역사의 흐름에 휩쓸리기보다 그것을 자기 목적에 맞게 형성한 인물들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는 요한 바오로 2세와 레이건이 무대를 압도했고, 대처, 고르바초프, 콜, 트뤼도 시니어 같은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 그 곁을 채웠다. 또한 공적 삶에서 도덕적 증언을 세운 거대한 인물들—성 오스카 로메로, 레흐 바웬사, 코라손 아키노—이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직무의 무게에 걸맞게 성장하는 지도자를 길러내기 어렵지만, 돌런이 뉴욕에 부임했을 무렵 이미 아이폰은 출시된 이후였다. 컴퓨터조차 사용하지 않고—강론은 늘 노란 법률 메모지에 손으로 썼다—그는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새로운 소통 기술을 체득했다. 즉, 할 말이 있었고, 그것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말할 수 있었으며, 미소와 웃음으로 전했다. 노이하우스 신부가 즐겨 쓰던 단어 가운데 하나는 ‘호감 있는(winsome)’이었다. 그것이 그의 사목 전략이었고, 돌런 역시 그것을 선호했다.

    물론 미소와 웃음만이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오코너 추기경은 불굴의 에너지와 의지로 미국 주교단의 분명한 목소리가 되었다. 2000년 그가 선종하자, 그 역할은 시카고의 프랜시스 조지 추기경에게로 넘어갔는데, 그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유형을 닮은 용기 있는 지성적 지도자였다. 돌런은 그 역할을 자신의 역량에 맞게 이어받았다. 비판자들도 있었지만, 오코너 시절만큼 격렬하지는 않았다. 그의 미소와 웃음은 많은 이들에게 말 그대로 무장을 해제시키는 힘이 있었다.

    2004년, 뉴욕 대주교로 임명되기 5년 전, 노이하우스 신부는 당시 밀워키 대주교였던 돌런을 에라스무스 연례 강연에 초청했다. 미국적 ‘공의회주의’—오늘날이라면 ‘시노달리티’라 불릴—의 흥망을 다루며, 돌런은 “젊은 사제들과 주교들 사이에서 생동감 있는 신학적 정통성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전적으로 열정적으로 헌신하면서도, 가톨릭 정체성의 상실, 평신도들 사이의 도덕적 해이, 전반적인 교리 교육의 무지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폴란드 출신 교황의 생애 마지막 해에, 돌런은 이른바 ‘요한 바오로 2세의 주교들’이 신앙을 더 효과적이고, 더 호감 있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며 희망을 표했다. 그는 자신도 그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베네딕토 16세가 돌런을 뉴욕으로 부른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2012년 2월,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하면서 로마에 모인 전체 추기경단 앞에서 연설하도록 초청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베네딕토는 그에게 ‘선교와 복음화’라는 주제를 맡겼는데, 이는 그해 10월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한 세계주교대의원을 이미 소집한 뒤였다.

    돌런은 이 연설을 위해 폭넓게 자문을 구했다. 필자는 아우구스티노와 뉴먼의 글을 일부 제안했지만, 두 인물 모두의 저명한 학자인 베네딕토 앞에서 그들을 인용하는 것은 다소 과할 수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는 그것을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우리는 내기를 했다. 만약 그가 연설에서 두 사람을 인용한다면, 필자가 저녁을 사기로.

    다음 날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그렇게 했다고 선언했다. 필자는 기꺼이 빚을 갚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뉴욕에 갈 때마다 그는 이미 매일 저녁 여러 약속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 식사는 성사되지 않았다. 은퇴 후에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연설에서 가장 도전적인 대목은 신학이나 역사가 아니라, 동료 추기경들이 충분히 ‘호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였다. 그는 로마 유학 시절, 신학생들에게 들려주던 조언을 회상하며 이를 풀어냈다.

    “우리는 그가 지적인 강론을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라고 그는 사제성 소성성 장관이었던 존 라이트 추기경과의 미사를 회상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신학생 여러분, 나와 교회를 위해 큰 부탁 하나만 합시다. 로마 거리를 걸을 때, 웃으세요!’”

    “선교사, 복음 선포자는 기쁨의 사람이어야 합니다.”라고 돌런은 이어 말했다. “내가 뉴욕 대주교가 되었을 때, 어떤 사제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맨해튼 거리를 걸을 때 계속 웃고 다니면 체포될 겁니다!’”

    돌런은 끝까지 미소 짓고, 웃고, 기쁨을 발산했다. 그것은 그의 성격이기도 했지만, 1970년대의 혼란과 1980년대에 되찾은 새로운 자신감에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공의회 이후 좋은 소식은 교회의 승리주의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추기경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쁜 소식은, 자신감도 함께 죽었다는 것이었죠.”

    그 자신감은 요한 바오로 2세와 오코너, 그리고 로마 교리성에서 활동하던 라칭거 자신을 포함한 이들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바로 그 자신감 때문에 노이하우스 신부는 1987년 ‘가톨릭의 순간’을 말할 수 있었고, 결국 1990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 연설 1년 뒤, 베네딕토는 사임했고, 돌런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출한 콘클라베에 참여했다. 초기에는 열정적이었지만, 곧 그는 새 교황의 핵심 그룹에서 멀어졌다. 돌런이 베네딕토에 의해 승격된, 명백한 ‘요한 바오로 2세형 주교’였다는 점이 한 이유였다.

    2004년 그가 말한 ‘생동감 있는 신학적 정통성’—정통성뿐 아니라 그 생동감 자체—이 프란치스코와 충돌하는 지점이 되었다. 프란치스코의 선호 방식은 유쾌함이 아니라 질책이었다. 그는 낙태를 “청부 살인”에 비유했고, 젠더 이데올로기를 “우리 시대 가장 추한 위험”이라 했으며, 금융가들에 대해 “이 경제는 사람을 죽인다”고 말했다.

    전통주의자들은 “뒤처진 이들”, 신학생들은 “작은 괴물들”, 교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돌을 던진다”고 표현했다. 2014년 교황청 성탄 인사에서는 교황청 관료들의 ‘영적 질병’ 열두 가지 이상을 열거하며 질타했다. 돌런의 분위기는 맞지 않았다. 미소는 퇴출되었고, 찡그림이 유행이었다.

    대주교로서의 마지막 해, 돌런은 성 패트릭 대성당 입구에 실물보다 큰 인물들이 그려진 벽화를 설치했다. 그중 뉴욕 가톨릭의 역사적 인물들을 기념하는 패널에는, 1928년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 후보였던 4선 주지사 앨 스미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돌런은 그가 반드시 시가를 문 모습으로 그려져야 한다고 고집했다. 노이하우스 신부가 그 벽화를 좋아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디테일만큼은 분명히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그는 돌런보다도 하루에 더 많은 시가를 피웠으니까.

    스미스는 ‘행복한 전사(Happy Warrior)’로 알려져 있었고, 그의 이름을 딴 연례 만찬에서 같은 이름의 상이 수여된다. 돌런 역시 그러했다. 명사보다 형용사에 더 무게가 실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가 대립을 즐겼다면, 교황 레오 14세는 일치를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유쾌하고 자신감 있는 뉴욕 대주교는 큰 자산이다. 이제 일리노이주 졸리엣 교구의 로널드 힉스가 그 뒤를 잇는 임무를 맡게 된다. 다만 같은 볼륨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새 대주교는 출발부터 좋은 미소를 지니고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2-28 09:00]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 다른기사보기 리베르타임즈 기자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