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22] 노동은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 리키 매크로스키 Ricky McRoskey writes from Connecticut. 칼럼리스트

  • 교황 레오 14세의 교황직 초창기 이 시기에,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인공지능(AI)의 책임 있는 사용이 그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필자로 하여금 조경 일을 떠올리게 했다.

    10년 전, 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작은 마당이 딸린 방 두 개짜리 집에 살고 있었다. 매주 주말마다 내 몫의 일은 잔디를 깎고 덤불을 다듬는 것이었다. 제대로 하면 한 시간이 걸렸다. 허리를 끊는 노동은 아니었지만, 대개는 후텁지근한 습기 속에서 했고 땀이 많이 났다.

    일을 마치고 나면 샤워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차가운 맥주를 집어 들고 잔디밭을 바라보며 첫 모금을 마셨다. 낮고 단정하며 줄무늬가 선명한 잔디를 바라보는 그 순간의 만족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집 마당이 동네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잡초도 많았고 선도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 이 손질된 작은 땅 조각을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건 내가 한 일이야.”

    결국 우리는 이사를 했고, 가족도 성장했고 마당도 더 넓어졌다. 토요일마다 나는 다른 일들에 더 몰두해야했다. 그래서 우리는 잔디 깎는 일을 외주로 맡겼다. 계속 내가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아내는 말했고, 나도 동의했다. 지금도 토요일 저녁이면 맥주를 들고 잔디밭을 바라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잔디 상태는 내가 직접 깎던 때보다 더 좋다. 하지만 토요일이 어쩐지 더 얇아지고, 더 작아지고, 덜 완성된 느낌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회칙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에서 인간 노동의 두 가지 목적을 강조했다. 그것은 객관적 목적과 주관적 목적이다. 객관적 목적, 곧 노동의 대상은 재봉틀을 발명하거나 집을 짓거나 복식부기 회계를 가르치는 것처럼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내가 잔디를 깎을 때에도, 나는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 더 깨끗하고, 더 걷기 좋고, 더 아름다운 땅 조각이다. 노동은 타인을 위해,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노동의 다른 한편은 그 주관적 가치다. 사람이 일할 때, 요한 바오로 교황은 이렇게 썼다. “이 모든 행위는 인간으로서의 소명을 실현하고 인격으로서의 부르심을 완수하는 데 봉사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은 만들어진 결과물만을 위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 자신을 위해 수행된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일은 단지 원재료를 변형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내가 잔디를 깎을 때, 그것은 내 안의 무언가를 움직인다. 배움이나 성취감, 혹은 겸손의 감각을 불러일으켜 나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 노동은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사회와 경제가 이 두 가지 목적, 곧 객관적 목적과 주관적 목적을 모두 염두에 두고 설계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둘이 자주 충돌한다. 새로운 기계는 일자리를 파괴한다. 물론 새로운 일자리도 만들어낸다. 하지만 한때 존재하던 그 옛 일자리는 사라진다. 이제 머스킷 총을 만드는 장인은 더 이상 없다.

    물론 인간의 삶은 언제나 변화와 그에 따른 대가로 이루어져 왔다. 새 동생이 생기면(좋다!), 이제 혼자만의 관심은 줄어든다(슬프다!). 날씨가 맑고 화창하면(좋다!), 해변은 붐빈다(슬프다!). 당신의 노래가 차트 1위에 오르면(좋다!), 식당에서 조용히 식사하기는 어려워진다(슬프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진정한 진보를 가져오기를, 좋은 점이 나쁜 점보다 크기를 늘 바란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전기 담요는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었지만(좋다!), 화재와 백혈병을 유발하기도 했다(나쁘다!).

    시장과 경제를 다룰 때 우리의 큰 과제는 사물의 진정한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일이다. 더 많이 배울수록 우리는 더 온전하고 미묘한 시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정적 외부효과의 본질이다.

    즉, 실제 비용이 숨겨져 있거나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다. 공장의 폐기물을 강에 버리면 단기적으로는 이윤이 늘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나 정부가 이 숨겨진 비용을 인식하고 바로잡게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둘러싼 논쟁에서 눈에 띄는 점은, 우리가 그 부정적 측면을 얼마나 무질서하게 평가해왔는가 하는 것이다. AI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며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12초 만에 보도자료를 쓰고, 웹사이트를 코딩하며, 『햄릿』에 나타난 복선의 사용을 분석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분명 노동의 객관적 목적을 돕는다. 그것은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잔디를 잘 깎는다.

    그러나 사회 전체로 볼 때, 우리는 노동의 객관적 목표를 향한 AI의 진보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반면, 그것이 노동의 주관적 목적에 무엇을 하는지는 과소평가해왔다. 교황 레오 14세는 최근 바티칸의 AI 회의에서 이 점을 강조하며, 인공지능에 대한 모든 판단은 “물질적 차원뿐 아니라 지적·영적 차원에서의 인간 인격의 복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 AI의 이익과 위험은 바로 이 더 높은 윤리적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더 높은 윤리적 기준”, 곧 노동의 주관적 목적은 부모들에게는 즉각적으로 이해된다. 딸아이가 철봉에 매달려 있을 때, 만약 당신이 노동의 객관적 목적—즉 아이의 몸을 기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옮기는 것—만을 고려한다면, 그냥 아이를 안아서 반대편에 데려다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우리는 모두 안다. 철봉을 건너는 일이 가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과정에 시간과 어려움과 실패—말하자면 비효율—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과 어려움과 실패야말로 노동의 주관적 목적, 다시 말해 인격(성품)을 형성하는 유일한 길이다.

    훌륭한 경영자, 훌륭한 기업, 훌륭한 경제는 가치 있는 결과물과 인격 있는 사람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공지능은 전자만을 만들어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카네기멜런이 AI 도구를 사용한 319명의 지식 노동자를 추적한 최근 연구를 보자. 이 연구는 생성형 AI가 노동자의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사고를 더 게으르게 만든다는 두 가지 사실을 밝혀냈다.

    유사한 MIT 연구는 챗GPT의 장기 사용이 “인지적 부채의 축적”을 낳는다고 밝혔다. 이는 이른바 ‘뇌 부패’를 표현한 가장 창의적인 완곡어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연구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해준다. AI는 우리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더 나쁜 인간으로 만든다.

    AI가 우리를 멍청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처방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우리는 AI 도구를 어떻게, 그리고 사용해야 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 어떤 지침을 따라야 할까?

    한 가지 답은 신중한 판단(prudential judgment)이다. 도구를 사용할지 말지 결정할 때, 채소를 자를 때 칼을 쓰는 것은 분명 옳고, 아이들에게 잠자리 동화를 읽어줄 때 로봇을 쓰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그 중간 영역에서는 우리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에세이를 쓰거나, 그래프를 만들거나, 설문 자료를 분석하거나, 노래를 만들거나, 영상을 편집하거나, 감사 카드를 쓰거나, 거주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AI 도구를 사용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다음 질문들이 판단에 도움이 될 것이다.

    AI는 비판적 사고를 자극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외주화하는가? AI로 시간을 절약했다면, 그 남는 시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주된 이익이 효율성이라면, 우리는 비효율적으로 무언가를 하면서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워왔는가?

    AI 도구를 쓰기 시작한 이후, 당신은 더 충만해졌는가 아니면 덜해졌는가? 이 일을 아들에게 가르친다면, 이 도구를 사용하게 하겠는가? 노동의 목적을 노동자인 당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 도구는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가? 만약 이 일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그분은 당신이 그 일을 만들어낸 과정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렇게 썼다. “어떤 것의 대가는 그것을 위해 교환되어야 하는 삶의 분량이다.” 인공지능의 대가 역시 비슷한 질문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도구를 사용할 특권을 얻기 위해, 나는 내 인간성의 얼마만큼을 내놓아야 하는가?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2-29 07:57]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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