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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디 시집 '지옥에서 부른 노래' 표지 |
‘북한의 솔제니친’으로 불리는 저항 작가 반디의 시집 《지옥에서 부른 노래》가 원제 그대로 세상에 다시 나왔다. 2014년 단편소설집 《고발》로 북한 체제의 비인간적 실상을 세상에 폭로한 이후, 《붉은 세월》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작품집이 나온지 10년만이다.
문학에서 시(詩)라는 영역은 특정 독자층과 함께 적은 언어로 울림의 의미를 담는 장르이다. 그래서 시는 단어 하나, 이미지 하나로 압축되며, 인간 내면의 감정, 사유, 신앙, 상처, 갈망을 다룬다.
《고발》이 북한 주민들의 과거와 현재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영구적 노예 상태’임을 산문으로 증언했다면, 《지옥에서 부른 노래》는 시(詩)라는 가장 압축된 언어를 통해 그 지옥의 현장을 독자 앞에 직접 불러낸다.
반디에게 시는 미학적 장식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마지막 고발 수단이다. 이 시집에는 북한 주민의 암울한 현실과 봉쇄된 미래, 그리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 왕조에 대한 분노와 절규가 숨김없이 담겨 있다.
이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시 〈신성천역〉이다. 이 시에서 반디는 ‘역(驛)’이라는 공간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의 종착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따기군의 칼날에 낟알짐 찢긴
녀인의 통곡소리 내 가슴도 찢는
아 신성천역 공산주의 종착역”
굶주림과 수탈, 폭력이 일상이 된 공간에서 찢겨 나간 것은 곡식을 담은 자루만이 아니다. 번다는 ‘녀인의 통곡’을 통해 체제가 파괴한 인간의 존엄과 생존 그 자체를 드러낸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신성천역은 더 이상 이동의 장소가 아니다.
“굳어진 거지시체 밟고 넘으며
생활전선 대군이 아우성치는
아 신성천역 공산주의 종착역”
‘생활전선 대군’이라는 북한식 선전 언어는, 굳어버린 거지 시체 위를 밟고서야 유지되는 체제의 잔혹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폭로한다. 그리고 시는 마침내 이렇게 끝난다.
“악사(惡史)천리 피눈물에 절고 절어서
콘크리트 바닥조차 원한을 뿜는
아 신성천역 공산주의 종착역”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어 스며든 끝에, 이제는 무생물인 콘크리트조차 원한을 토해낸다는 이 구절은, 반디 시의 윤리적 정점을 이룬다. 공산주의는 약속된 낙원이 아니라, 피눈물이 굳어버린 종착역이라는 절규이자 선언이다.
신성천역이라는 시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공포의 시대.. 수백만이 굶어서 죽었다는 ‘고난의 행군’ 시기.. 굶주림에 지쳐있는 가족을 위해 곡창지대라는 황해도를 찾아가면 논바닥에 떨어진 ‘쌀한톨’이라도 주울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기찻길을 헤메이던 어머니의 눈물을 담아 쓰여진 비극의 시다.
시집 해설을 쓴 김재홍 시인은 반디의 시어가 지닌 정치적·윤리적 함의를 날카롭게 짚는다. 그는 ‘적염(赤厭)’이라는 조어를 두고 “‘붉은 것이 싫다’는 의미이자, ‘도적 무리의 기세’를 뜻하는 적염(賊炎)으로도 읽힌다”고 설명한다.
한국의 국어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 단어는, ‘붉은 세월’과 ‘붉은 인간들’을 강요해 온 북한 체제 전체에 대한 근원적 거부 선언이다. “온누리의 붉은 빛 다 씻어내고 싶다”는 반디의 절규는, 이념을 넘어 인간성 말살에 대한 증언으로 다가온다.
시집의 한 추천사는 이 시집이 단지 북한 내부의 비극을 기록한 문학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는 반디의 친필 원고지를 반출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위기의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세상의 지옥을 체감하고 있을 반디와 북한 노예 주민들이 부르는 노래가 이 책에 모두 담겨 있다”고 말한다.
《지옥에서 부른 노래》는 휴전선 너머의 고통을 그저 바라보거나 감상하는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대한민국 역시 안전하지 않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반디의 고발은 이미 세계를 향해 울려 퍼졌다. 《고발》의 영어 번역으로 영국 펜(PEN) 번역상을 수상한 데브라 스미스는,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작 《채식주의자》의 번역가이기도 하다. 《고발》은 유럽연합(EU)의 사하로프 인권상 후보에 올랐고, 전 세계 30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번 시집에 실린 50편의 시는, 그가 그토록 목 놓아 부르고 싶었던 또 하나의 고발이자, 다시 세계를 향해 띄우는 ‘반디의 꿈’이다.
《지옥에서 부른 노래》는 쉽게 읽히는 시집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시집이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독자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지옥은 과연 저들만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침묵과 무관심 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구조인가. 반디의 시는 그 질문을 끝내 회피하지 못하게 만든다.
도·희·윤 (사) 행복한통일로 대표 / 리베르타임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