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필자는 『큐브와 대성당 : 신 없는 정치, 유럽과 미국』이라는 작은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적지 않은 판매고를 올렸고, 프랑스어·스페인어·폴란드어·이탈리아어·포르투갈어·헝가리어로 번역되었으며, 『포린 어페어스』 선정 베스트셀러로 꼽히기도 했다.
필자는 이 책에서 유럽이 ‘문명적 사기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경직된 정부 관료제, 서방 방위에 적절히 기여하려 하지 않는 태도, 오늘날 우리가 ‘워크(woke)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여러 형태의 사조, 그리고 출산율의 붕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즉,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미래 세대를 낳음으로써 인간의 미래를 창조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다.
당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이는 필자만이 아니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2003년 교황 권고 「유럽 안의 교회」에서 유사한 우려를 제기했다. 그는 유럽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언급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많은 이들을 사로잡는 내적 공허… 광범위한 실존적 파편화, 그 안에서 만연한 고독감… 가족 개념 자체의 약화… 집단과 개인을 자기 자신 안에 가두는 이기주의… 윤리에 대한 관심의 증대가 아니라, 개인적 이익과 특권에 대한 집착이 커지면서 출산 수의 감소로 이어지는 현상.”
교황의 관찰도, 필자의 분석도 분노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하물며 경멸에서 비롯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유럽인이었고, 필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유럽이 이식된 존재라고 믿어왔다. 우리 둘 다 애정과 우려에서 글을 썼다.
아마도 바로 이 점이 『큐브와 대성당』에서 필자가 쓴 내용, 「유럽 안의 교회」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쓴 내용, 그리고 최근 발표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NSS)」이 유럽이 ‘문명적 소멸’의 전망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의 결정적 차이일 것이다.
물론 교황과 필자가 글을 쓴 이후 유럽의 인구학적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유럽이 스스로 초래한 대규모 불임 상태가 남긴 공백을, 다른 문명권에서 온 수많은 이민자들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의 실패한 국가에서 피난처를 구하면서도 서방 문명을 경멸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NSS가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유럽은] 20년 이내, 혹은 그보다 더 짧은 시간 안에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언어가 아무리 강경하더라도 전적으로 과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이미 그렇게 된 유럽의 일부 지역들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NSS에서 문제 삼는 것은 어조가 아니라 실질적인 결함이다. 그것은 유럽이 21세기에 겪고 있는 병폐의 뿌리를 충분히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가 보여주는 잔혹한 신(新)제국주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태연해 보인다는 점이다.
레온 캐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의 심장에는 ‘하느님 크기의 구멍(God-sized hole)’이 있다. 이는 수세기에 걸친 세속주의의 결과이며, 또한 유럽 가톨릭의 상당 부분이 ‘새로운 복음화’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중심지에 대한 재복음화—혹은 많은 경우에는 실질적인 복음화—에 나서지 못한 책임도 인정해야 한다.
세속주의적 시대정신, 퇴폐적 문화, 워크 정치에 영합하는 ‘라이트 버전의 가톨릭(Catholic Lite)’은 유럽의 문명적 사기 위기와 인구학적 자기소각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워크 세속주의가 자치 국가나 유럽연합 모두에게 견고한 문화적 토대를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럽인들의 상당수가 인식하기 전까지, 유럽은 실현 가능한 미래를 찾아 헤매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결정적 다수를 형성하도록 돕는 것이 오늘날 유럽에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이는 당파 정치에 개입함으로써가 아니라, 모든 인간 삶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는 유럽이 프랑스식 ‘라이시테 laïcité(라이시테(Laïcité) 프랑스의 핵심 헌법 원칙, 국가와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의 완전한 중립성과 분리를 의미)’와 그것이 개인·문화·공적 삶에 끼치는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영향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을 멈출 때가 지났다. 그러한 부당한 습관에서 벗어날 때, 유럽은 자신의 문명적 유산에 걸맞은 미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에 관해서 말하자면, 차르 푸틴에게 사로잡힌 나라와 ‘전략적 안정성’을 재확립한다는 것이 NSS에서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주권을 가진 유럽 국가를 상대로 한 러시아의 야만적 침공—문명화된 행동의 거의 모든 국제 규범을 위반하며 수행된 정복 전쟁—의 4주년을 목전에 둔 지금, 어떻게 진지한 사람이 ‘안정성’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드러낸 통치자, 곧 냉전에서 내려진 역사의 판결을 전복하고 스탈린의 대내·대외 제국을 재건하려는 인물 아래 통치되는 러시아와의 ‘전략적 안정성’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인간의 권리 수호와 증진을 미국 외교정책의 관심사로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은, 새로운 NSS를 서방 세계의 도덕적 통제력과 목적 의식을 회복하자는 설득력 있는 호소로 만들지 못하게 한다. 이는 또한 세계 문제에서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역량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략을 ‘사업 기회(business opportunity)’와 혼동할 때, 이런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