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26] 빈스 길리건의 『플루리부스』가 지닌 천재성
  • 제이슨 M. 백스터 Jason M. Baxter is the director for the Center for Beauty and Culture at Benedictine College. He writes on Substack (Beauty Matters). 문화센터 소장

  •      * '플루리부스 Pluribus'는 라틴어로 '여럿에서 하나로' 또는 '다수에서 하나'라는 의미

    성탄 전야에 최종회가 방영된 빈스 길리건의 『플루리부스』는, 전형적인 X세대 영화감독에게서 기대할 법한 특유의 아이러니한 음조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브레이킹 배드』와 『베터 콜 사울』의 창조자인 길리건은 기대를 설정한 뒤 그것을 전복시키는 데 능한 인물이다. 1화에서 고전적인 외계 침공 영화들에 대한 암시는, 침을 흘리는 입과 비인간적인 비명으로 가득한 외계인의 ‘점프 스케어’를 예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즌이 진행될수록 우리는 『플루리부스』가 블록버스터급 외계인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불안하고 섬뜩한 무엇임을 깨닫게 된다.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어떤 고등 문명은, 고출력 송신기를 이용해 지구로 신호를 발사했는데, 그 안에는 바이러스 유사 감염을 일으키는 RNA 염기서열이 내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감염은 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익한 것으로 드러난다. 감염이 이루어지면, 전 인류는 각자의 자연적인 전자기 방출을 동일한 주파수로 조율함으로써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이른바 ‘결합(Joining)’의 긍정적 효과는, 마침내 인류 전체가 완전한 협력 상태에 들어선다는 점이다. 실제로 모든 개별성은 소거되고, 개별 인간은 거대한 전 지구적 유기체의 단일 기관처럼, 혹은 전 세계적 개미집 속의 개미들처럼 기능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끈적한 촉수를 흔들며 으르렁거리는 포식적 괴물 대신, 예의 바른 점령이 등장한다. 이는 바이러스 이후의 사회로서, 진보주의자의 모든 꿈이 실현된 세계다. 모두가 완벽히 동기화되어 있기에 세상은 아마존의 물류 시스템처럼 운영되고, 그 결과 낭비는 사라진다. 범죄가 없기에 밤에는 전력을 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 개별성이 없기에 인종차별·성차별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이 서로 조율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의 기억과 심리적 경험에 접근할 수 있다. 이를테면, 비엔나의 화창한 아침에 마셨던 정말 훌륭한 커피 한 잔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그 기억을 자동으로 집단 기억에 ‘업로드’하고, 모든 사람은 언제든 그 기억에 접근할 수 있다. 그들이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띠고 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때문에, 설명되지 않은 유사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성 때문에 우연히 ‘결합’에서 제외된 열두 명의 인간들 대부분이, 다시 포함되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다만 예외가 있으니, 바로 무례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해적 테마의 저급 로맨스 소설을 쓰는 작가 캐럴 스터카다.

    1화에서 캐럴은 ‘결합’ 도중 입은 부상으로 파트너 헬렌을 잃고, 그로 인해 집단 의식을 증오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독립적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것을 잃느니 차라리 불행을 택한다. 그녀의 남미 쪽 대응 인물은 파라과이 출신의 마누소스 오비에도로, 편집증적 성향과 강박장애를 지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강인한 인물이다. 시즌이 전개되는 동안, 이 기이하고 반사회적인 인물들은 집단 의식의 선교적 열정이 자신들의 개별성까지 말살할 방법을 찾아내기 전에, 그 계획을 좌절시킬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한다.

    그러나 영화감독으로서 길리건의 특별한 재능은, 작가주의 감독들의 손에서는 종종 자의식 과잉이고 현학적이며 지루해 보이는 가장 화려하고 실험적인 촬영 기법을 차용해, 그것을 우리의 감정 수용 능력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길리건은 마누소스가 파라과이에서 뉴멕시코까지 캐럴을 만나러 떠나는 긴 여정을 묘사하면서, 일련의 크로스페이드를 사용한다. 기술 혐오자인 마누소스가 오래된 지도 위에 마커로 이동 경로를 표시하는 장면을, 산맥을 지나고 남미 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풍요로운 영상 위에 겹쳐 놓는 것이다. 마누소스가 도보로 이동을 계속할 때, 길리건은 다리엔 갭(Darién Gap)의 숨 막히는 영상을 제공한다. 이런 예는 끝이 없다.

    그러나 길리건은 이처럼 거대하고 원경적인 풍경 이미지뿐 아니라, 거의 현미경적 수준까지 ‘확대’하는 것도 즐긴다. 예컨대 얼음의 무늬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든 뒤, 다시 맥락을 제공하기 위해 ‘축소’한다.

    길리건이 촬영 기법 차원에서 수행하는 이 작업은, 이야기 전개 차원에서도 반복된다. 우리가 처음 캐럴을 만날 때, 그녀는 자신이 보이길 원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깔끔하게 관리된 사인회에서, 마케팅을 위해 통제된 이미지를 제시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캐럴을 그녀의 삶과 관계들 속에 ‘확대해’ 배치해 보면, 그녀에게는 음주 문제가 있고, 자신의 책들이 거짓되었다고 여겨 그것들을 혐오하며, 성미가 까다롭고 우울하며 통제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러한 모든 기법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사용되었지만, 『플루리부스』에서 길리건은 이 ‘확대와 축소’를 변증법을 설정하는 데 사용한다. 우리는 때로는 한쪽에, 때로는 다른 쪽에 공감하게 된다. 현대인의 즉각적인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가치들—자기 인격, 개별성, 행위 주체성을 잃는 것에 대한 거부—에 집착하는 캐럴을 응원하고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개인주의가 캐럴의 고독, 불행, 이기심, 파괴적인 알코올 중독이라는 맥락 안에 다시 배치될 때, 우리는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차라리 결합의 일부가 되는 것이 더 나은 것은 아닐까?’

    동시에, 집단 의식은 조니 애플시드와 스베덴보리안들의 윤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없고, 동물을 먹지 않으며, 식물조차 해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부유한 백인 진보주의자가 꿈꾸던 세계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완전한 공유, 100퍼센트 협력, 전쟁도 빈곤도 인종차별도 없는 세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기이할 정도로 친절하고 항상 도움을 주려 하기 때문에, 이 종말 이후의 세계는 『트루먼 쇼』나 『미스터 로저스의 이웃』을 연상시키는 예상 밖의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풍긴다.

    길리건이 가족 가치와 세상을 자기들처럼 웃고 상냥하게 만들려는 열정에 사로잡힌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풍자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플루리부스』에서는 유토피아적 협력의 대가가 급진적인 자율성의 상실임이 드러난다.

    ‘결합된’ 인간들은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거대한 창고 안에서 침낭을 깔고 잠을 자며, 벌집 속 곤충처럼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가족도, 고향도 없고, 케추아어에서 일본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사랑할 수 있는 어떤 고유함, 어떤 특수성도 없다. 그리고 이는 불쾌한 단백질 보충 방식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전의 이야기다.

    근대성은 낭만주의의 영웅적 개인주의와, 과학 혁명의 방법론을 재배치해 완전히 합리적인 사회를 구축하려는 계몽주의의 꿈이 충돌하는, 근본적으로 분열된 시대다. 『플루리부스』에서 길리건의 재능은 이 두 경향을 정수로 증류해낸 뒤, 그것들을 변증법적 긴장 속에 충돌시키는 데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6-01-02 07:40]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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