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위기를 다룬 탁월한 저서 『민주주의와 연대: 미국 정치 위기의 문화적 뿌리에 대하여』에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는, 지속적인 연대(solidarity)는 공통의 확언과 공유된 사랑 위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연대는 단순한 합의보다 훨씬 더 풍부한 개념이다.” 연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유사한 정서와 태도를 인식할 때 생겨나며, 그로부터 “‘우리됨(we-ness)’ 혹은 ‘함께함(usness)’의 감각”이 형성된다.
헌터는 미국의 ‘우리됨’과 공통의 확언, 그리고 공유된 사랑이 다양한 원천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존 로크와 영국 계몽주의의 다른 인물들이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개신교 그리스도교, 특히 청교도주의와 감리교와 같은 비국교도 전통, 그리고 부흥주의적·민중주의적 개신교가 수행해 온 지속적인 역할 또한 강조한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개신교 형태들은 정치적 혼합주의에 친화적이었으며, 그는 이를 미국의 “혼합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자유주의적 권리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발전되었지만, 그것이 종교적 신앙과 전통적 도덕 관습(mores)에 대한 이성주의적 공격을 수반하지는 않았다.
헌터는 혁명기 인사들 가운데, 미국이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마련하신 천년 왕국적 계획을 완성하시는 도구가 될 것이며, 동시에 “자유로운 정부, 이성, 진보, 그리고 ‘인간의 권리’의 본향”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던 이들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헌터의 서술에 따르면, 이러한 미국의 혼합 계몽주의는 연대의 지속적인 확장을 떠받쳤다. 처음에는 재산을 소유한 백인 남성에게만 주어졌던 권리가 점차 임금 노동자, 흑인, 여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본래 개신교인들로 한정되었던 미국적 ‘우리됨’은 가톨릭 신자, 유대인, 그리고 몰몬교 신자와 같은 종교적 외부자들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개혁의 근거는 미국 전통 내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단절이 아닌 발전의 이야기로 이를 서술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연대』는 연대가 확장되고, 한때 배제되었던 이들이 공동체 안으로 포함되는 미국의 역사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자유주의적 절반에 불과하다. 미국의 역사는 또한 연대를 새롭게 하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비자유주의적 방법들이 동원되었던 시기들로 점철되어 있다. 산업혁명기의 격변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 그러한 시기 중 하나였으며, 이 시대에 우드로 윌슨은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윌슨은 보수 진영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그는, 위대한 미국의 자유 전통을 배반한 것으로 여겨지는 두려운 “행정 국가”를 구축한 장본인으로 지목된다. 보수주의자들은 윌슨과 루스벨트가 사회를 위로부터 지휘하려 했으며, 기술관료들의 비자유주의적 전제를 개시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에는 일리가 있다. 젊은 시절 윌슨은 미국의 헌정 체제를 다룬 영향력 있는 저서 『의회정부론』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이 책에서 그는 위원회 중심의 입법 과정이 초래하는 경직성과 무기력을 한탄했다. 그는 미국 국가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와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더 역동적이고 활력 있는 통치 형태를 촉구했다. 실제로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부 제한 장치에서 벗어나는 것은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대통령이 영국의 내각제에서 수상이 수행하듯 입법부의 사실상 지도자가 되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윌슨이 정치에 입문했을 때—먼저 뉴저지 주지사로, 이어서 1912년 최초로 선출된 미국 대통령으로—그는 헌법 개정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민주당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연방준비제도를 설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연방 소득세를 도입했으며, 반독점법을 집행하기 위한 연방거래위원회를 창설했다. 또한 아동 노동을 규제하고 철도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당시의 경제적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를 자유시장 질서를 떠받치는 ‘계약의 자유’라는 자유주의 원칙의 침해로 비난했다. (1905년 연방대법원의 중대한 판결인 『로크너 대 뉴욕주』는 바로 이 자유주의 원칙을 옹호했다.) 더욱이 윌슨은 종종 입법자들을 건너뛰고 직접 국민에게 호소함으로써 이러한 입법적 성과를 달성했다.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들이 잘 알고 있었듯이, 직접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원칙의 우호자가 아니다.
윌슨만이 개혁에 대한 진보적 열정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1912년의 3자 대결 선거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승리했다면, 그는 또 다른 형태의 강력한 행정 지도력을 추구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본성적으로 권력에 끌리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들의 역사적 역할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미국 국민은 금권적 지배에 깊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20세기 초, 스탠더드 오일과 U.S. 스틸과 같은 트러스트들은 산업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노동 분규는 전국을 뒤흔들었고, 좌익 정치 급진주의는 테러 행위를 낳았다. 대규모 이민은 국가의 인구 구성을 변화시키고 있었으며, 미국 산업의 비약적 성장은 미국을 세계 무대의 전면으로 밀어 올렸는데, 이는 오래된 미국 전통과 쉽게 조화되기 어려운 역할이었다.
요컨대 국가는 부유했으나 불안했고, 번영했으나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윌슨은 활력적이면서도 비자유주의적인 방법과 정책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통합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대체로 성공했다. 1920년 공화당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그의 주요 업적 가운데 어느 하나도 되돌려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20세기에 사회계약을 새롭게 하여, 정치와 경제 전반에서 폭넓은 자유주의적 접근이 지속되도록 보장한, 미국 특유의 규제된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로 남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대해서도 유사한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는 윌슨과 같은 유형의 선동가였으며, 더 큰 위기의 시기에 비자유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결속시켰다.
윌슨과 FDR은 20세기 전반 미국의 정치 문화를 지배했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가 다룬 인물들과는 달리, 이들은 미국 자유주의 서사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적 자유의 약속 속으로 포함의 범위를 확장하지 않았다. (윌슨은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제19차 수정헌법을 마지못해 지지했으며, 루스벨트는 흑인의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들의 소명은 달랐다. 그들은 미국의 연대를 새롭게 하는 일을 맡았으며, 이는 특히 계약의 자유를 포함한 특정 형태의 자유를 길들이고 억제하는 것을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로크너』 판례를 뒤집기 위해 대법원을 압박했다.) 한마디로, 윌슨과 FDR은 비자유주의라는 강력한 처방을 투여했다.
우리는 지금도 유사한 시기를 살고 있다. 이민, 경제적 취약성, 세계화.. 미국 국민은 불안해하고 있다. 다시금 강력하고 활력 있는 행정부가 자유주의적 규범을 압박하고 있는데, 이는 윌슨과 FDR의 시대와 닮아 있다.
필자는 현 행정부가 취한 개별 조치들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부는 현명하고 필요해 보이기도 하지만, 나의 요지는 더 근본적이다. 오늘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칼 슈미트나 샤를 모라스를 읽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한 국가로서 이 길을 걸어본 적이 있으며, 자유주의의 실패를 직면하고서도 자유라는 미국적 이상을 새로운 상황에 맞게 갱신하고 재형성한 정치가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2026년을 맞아, 우리는 윌슨과 FDR의 방법을 연구하고, 그들의 성취뿐 아니라 실패 또한 성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늘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보여주었던 혁신성과 담대함이 우리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