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인터넷 캡쳐 |
일본 조선신보는 새해 2026년 첫날, 김정은이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았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희망찬 새해’라는 수사와 달리, 공개된 장면은 미래 비전이나 민생 해법이 아니라, 과거 권력의 상징 앞에서 반복되는 의례였다.
새해의 출발점이 병원·학교·농장도, 식량과 전력 문제도 아닌 ‘영생홀’이라면, 그 사회가 무엇을 우선순위로 삼는지는 자명하다.
보도는 ‘최대의 경의’ ‘숭고한 경의’ 같은 찬미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언어의 기능은 추모가 아니라 권력의 재확인이다. 지도자와 고위 간부들이 집단으로 동원되어 ‘일심충성’을 다짐하는 장면은, 애도라기보다 충성의 갱신식에 가깝다. 추모의 공간이 정치적 서약의 무대로 전환되는 순간, 죽음은 권력을 연장하는 장치가 된다.
같은 시기 북한 주민들이 직면한 것은 식량난, 의료 공백, 에너지 부족이다. 하지만 보도 어디에도 구체적 민생 해법은 없다. 대신 ‘무궁한 융성’이라는 추상적 구호만 반복된다. 의례는 과잉이고 정책은 실종된 상태다. 국가의 새해 첫 메시지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할수록, 선전과 삶의 간극은 더 벌어진다.
정치가 미래를 말하지 못할 때, 과거 숭배는 안전한 도피처가 된다. 그러나 지도자의 정통성을 영묘에 기대어 재확인하는 체제는, 스스로 미래를 설계할 능력이 없음을 드러낸다. 혁신과 개혁 대신 반복 의례에 의존하는 정치가 지속될수록, 사회의 활력은 소진된다.
새해 첫날, 무엇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가. 아이들의 교실, 환자의 병상, 농부의 밭이 아닌 영생홀을 택한 선택은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이 체제의 관심은 ‘내일의 삶’이 아니라 ‘어제의 권위’에 있다는 것. 그 선택의 비용은 결국 주민들이 치른다.
새해를 맞는 의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과거 앞에서의 경배가 아니라 현재의 고통에 대한 책임 선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희망찬 새해’라는 말은 또 하나의 공허한 구호로 남을 뿐이다.
김·도·윤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