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31] 베들레헴의 주님 공현 대축일
  • 사라 리어든 Sarah Reardon writes from Maryland. 기고가

  • 그날은 주님 공현 대축일 주일이었지만, 여행으로 지친 개신교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우리 일행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적어도 2023년 1월 8일 늦은 오후, 베들레헴으로 길을 나설 때까지는 그러했다.

    베들레헴을 방문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가던 중, 우리는 요르단강 서안 분리 장벽 앞에 멈춰 서서 그 위를 뒤덮은 온갖 낙서를 바라보았다. 도널드 트럼프를 조악하게 묘사한 그림들, “자유 팔레스타인”이라는 구호들, 군인을 마주한 어린아이들의 모습 사이에서, 대문자로 휘갈겨진 한 문구가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라헬이 울고 있다.”

    이 문구는 예레미야 예언서에서 나온 말로, 마태오 복음서에서 헤로데의 무고한 어린이 학살과 관련하여 인용된 구절이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통곡과 큰 울음소리였다. 라헬이 자기 자녀들을 두고 울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사라졌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마태 2,18).

    그 낙서의 의미대로라면, 라헬은 지금도 여전히 울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울음은 시간을 초월해 마태오가 부여한 상징적 의미를 계속 지니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자기 민족의 살해당한 이들을 위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문구가 장벽의 팔레스타인 쪽에 적혀 있다는 점에서, 낙서의 주인공은 라헬이 팔레스타인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무고하게 살해된 이들을 위해 울고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어찌 되었든, 그날 잿빛 1월의 베들레헴으로 들어가는 내내 라헬의 비탄은 나를 따라왔다. 더구나 베들레헴은, 우리가 방문했던 나자렛이나 요르단 강, 그리고 다른 유명한 성지들처럼, 내가 기대했던 아기자기하고 거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성가정이 머물 곳을 찾으며 이곳을 헤맬 때, 혹은 훗날 박사들이 신비로운 아기 임금을 찾아왔을 때도 베들레헴이 과연 아늑하고 경건하게 느껴졌을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도 나처럼 이 장소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휩싸였을 것이다. 거리에는 자동차 소음과 이슬람의 기도 초청 소리가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반짝였으며, 기념품 가게들은 사방에서 손짓했고, 우리 같은 관광객이든 히잡이나 케피예를 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든 인파가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 붐비는 구유 광장과 그보다 더 붐비는 예수 탄생 성당을 지나며, 내 마음 역시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은 입구, 이른바 ‘겸손의 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 더 깊숙이 예수 탄생 동굴로 내려가면서 나는 화려한 장식들에 대해 개신교 신자로서 흔히 느끼는 거부감을 느꼈다. 동시에, 전통을 불신하는 개신교적·근대적 합리주의 회의가 치밀어 올랐다. ‘이 문제에서 전통은 과연 신뢰할 만한가?’

    이곳은 2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의 탄생지로서 그리스도인들의 공경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도록 끊임없이 이어져 온 그리스도교 예배의 장소이며, 나 자신의 교회 전통과 그에 자주 뒤따르는 회의주의보다도 천 년 이상 앞선 역사를 지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는 성지를 순례한 뒤, 아들에게 이 성당 건립을 권했을 가능성이 크다.

    콘스탄티누스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의 마카리오스 주교의 감독 아래,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지 약 1년 뒤인 서기 326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성당은 정교회, 가톨릭교회, 아르메니아 교회를 비롯한 여러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일종의 공통 분모가 되고 있다.

    동굴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지는 대리석으로 덮여 있으며, “Hic de Virgine Maria Jesus Christus natus est”(“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열네 갈래의 은별로 표시되어 있다. 가까이에 있는 구유 또한 대리석으로 덮여 있고, 여러 촛불과 램프, 장식물로 꾸며져 있다.

    나는 그 짧은 한 단어, “hic(여기)”가 지닌 놀라운 단순함을 그때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 시점의 나는, 이곳이 본래 어떠했든 이미 돌과 보석과 예술품 아래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고 여겼다. 고전학자이자 성서학자인 E. M. 블레이클록은 『이스라엘에서의 여덟 날』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지가 “인간의 신심이 달아 놓은 온갖 번쩍이는 장식물로 뒤덮여 있다”고 표현했는데, 나 역시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내 마음 또한 회의와 피로로 어지럽게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주님 공현 대축일 주일을 돌아보며, 그 동굴 안에서 마땅히 느꼈어야 할 경외심으로 그날을 다시 바라본다. 우리가 방문한 지 불과 몇 달 뒤, 10월 7일의 학살 이후 이 긴장으로 가득 찬 성지가 전쟁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거의 깨닫지 못했다.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가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별이나 구유 앞에 설 차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그 한가운데서, 내가 그리스도의 탄생지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의 중대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섭리가 우리 이방인들을, 교회가 그리스도의 첫 이방인 경배자들인 박사들을 기념하는 바로 그 주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지로 이끌었다는 사실도 헤아리지 못했다. 더 나아가, 박사들이 바친 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귀한 예물과, 세기를 거쳐 그리스도인들이 그 거룩한 탄생지를 장식하고 공경하도록 이끌어 온 동일한 예배의 정신을 나는 연결시키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할 만큼 겸손하지 못했다.

    베들레헴에서의 주님 공현 대축일 체험은 나에게 어떤 거대한 교훈이나 심오한 신비를 즉각적으로 안겨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억은 내 마음 안에서 주님 공현의 의미를 점차 드러내 주었다. 이제 나는,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러 민족이 그분과 그분의 탄생지로 나아오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들은, 나 역시 아직 배우고 있는 그 겸손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말콤 가이트는 주님 공현에 관한 소네트에서 박사들과 우리의 연결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이 도착할 때
    그들은 우리를 함께 데려온다,
    우리 같은 이방인들을; 그들의 지혜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에…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찾았고,
    다른 곳에서 왔지만 결국 그분을 발견했다.
    성전에서는 사고파는 이들을 보았으나,
    더러운 마구간에서 거룩해진 땅을 발견했다.
    그들의 용기는 우리의 탐구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주어
    찾고, 발견하고, 경배하고, 기뻐하게 한다.

    박사들에게 드러난 그리스도의 계시는, 또한 우리에게 드러난 계시이기도 하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찾고, 무릎을 꿇고, 기뻐하도록 초대받는다. 세상의 헤로데들은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요르단강 서안 장벽과, 라헬의 울음을 상기시키던 그 무거움은 내가 예수 탄생 동굴에 머무를 때에도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날을 성찰해 온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의 무고한 이들은 여전히 살해되고, 훼손되고, 폭격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 동굴 안에는, 이미 모든 헤로데와 모든 악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마침내 완전히 압도할 그 별이 빛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 안에서, 베들레헴에서뿐 아니라 땅끝까지, 예배자들을 당신의 “거룩해진 땅”으로 부르고 계신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6-01-07 07:25]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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