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하이오, 미시간, 조지아(두 차례), 펜실베이니아, 앨라배마(이 또한 두 차례), 영국, 그리고 아이다호에서 살아왔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신학교에 다니기 위해 또 다른 집을 떠났으며, 박사 학위를 위해 일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국외로 나가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여행할 때(공짜로) 머물 곳이 생기도록 여기저기 흩어져 살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집에서 아이들이 모두 떠난 뒤, 아내와 나는 지난 세 번의 성탄을 사바나, 채터누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녀들과 손주들과 함께 보냈다. 지난 가을에는 브라질을 방문하며, 일곱 대륙 가운데 여섯 대륙에서 가르쳤다는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기도 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나는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뿌리 없는 세계 시민’, 과도하게 교육받았고, 정착할 장소가 없으며, 관계로부터 단절된 사람처럼 보일 법하다. 그러나 내 삶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삶의 첫 열여덟 해를 오하이오에서 보냈고, 그 뒤로는 내륙 북서부 지역에 또 십오 년을 정착해 살았으며, 모두 합쳐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금도 앨라배마에서 살고 있다. 이 모든 곳에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이 있고, 그 외에도 더 많은 관계들이 있다.
나는 세계를 떠도는 이들과 어떤 특정한 계층적 유대감을 느끼지 않는다. 내 친구들은 이웃이고, 친족이며, 함께 성당을 이루는 신자들이다. 내가 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들은 모두 참된 의미의 집이다.
그곳에서 나는 서로를 깊이 아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또한 그들에 의해 나 자신도 알려진다. 삶은 뿌리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중적으로 뿌리내린 삶이다. 겉으로 보기에 뿌리 없어 보이는 많은 이들도 같은 말을 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폴 킹스노스는 널리 논의된 저서 『기계에 맞서서』에서 현대의 뿌리 없음(rootlessness)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그는 시몬 베유의 사상을 빌려, 문화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보다 “더 견고하고, 더 영원하며, 더 지속적인 것들”—곧 문화적 전통과 의례, 그리고 자연 환경—에 묶여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뿌리내림은 아마도 인간 영혼의 가장 중요한 필요이면서도 가장 덜 인식된 필요일 것이다”라고 베유는 말하며, 이를 “과거의 특정한 보물들과 미래에 대한 특정한 기대를 살아 있는 형태로 보존하는 공동체의 삶에 실제적이고 능동적이며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킹스노스와 베유 모두 신학적 성찰에서 동기를 얻고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장소, 뿌리, 정착과 관련하여 복합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 아담은 흙에서 빚어졌고,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한 땅에 심으셨으며, 그들은 유배 중에 그 땅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당신께서 보여 주실 미지의 땅으로 가라고 부르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복음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육신의 상처 입은 세상으로 감히 내려오신 여정을 선포한다. 끊임없이 여행하던 사도 바오로 역시 독자들에게 특정한 장소에 뿌리내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사랑 안에 뿌리내리라고 말하며(에페 3,17),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라고 말한다(콜로 2,7).
바오로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지만, 머무는 곳마다 하룻밤이든 몇 달이든 기꺼이 맞아 줄 형제자매들과 집을 발견했다. 그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정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방황한 것도 아니었다. 어디를 가든 그는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남아 있었고, 하늘 도성의 시민으로 살아갔다.
킹스노스가 이 점의 상당 부분을 놓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원초적 상태를 “탐구가 필요 없는 안락한 상태”로 상정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창세기에 따르면, 타락 이전, 에덴의 하류에는 좋은 금과 브델리움과 마노가 나는 하윌라 땅이 있었다(창세 2,11-12). 이는 명백히 탐구를 향한 하느님의 초대처럼 보인다. 창조주께서 아담이 그 자리에 머물기만을 원하셨다면, 금을 동산 안에 두셨을 것이다.
인간은 안식을 향한 갈망과, 그에 못지않게 강한 위험한 모험을 향한 갈망 사이에 매달려 있다. 킹스노스는 현대인이 슈펭글러가 말한 “파우스트적 이념”—확장하고, 정복하고, 발명하고, 탐험하려는 채워지지 않는 충동, “머물러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며 멈추지 못하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안식일 없는 삶이 비인간적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본래 인간적인 동기를 왜곡한 것이다. 뿌리는 베유가 말하듯 인간의 근본적 필요이지만, 모험 역시 그러하다. 혹은 베유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험’이다. 그녀는 위험이 삶의 권태와 공포에 좌초되지 않도록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 지속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뿌리내림은 아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지만, 모험 또한 그렇다.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탐험에 대한 충동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다. 한때는 야심찬 정복자에게 소속된 군인들이나, 소수의 떠돌이 장인들, 혹은 왕들의 자본을 등에 업은 상인-모험가들만이 대양을 건너 세상의 경이를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수천 명의 아주 평범하고, 철저히 뿌리내린 사람들이 매일같이 카리브해 유람선이나 대륙 간 항공편에 오른다. 새로워진 것은 모험 그 자체가 아니라, 모험의 대중화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