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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엄 촘스키 |
미국을 대표하는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와 억만장자 성범죄자 엡스타인의 관계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확산되고 있다.
미국 법무부가 최근 추가 공개한 이른바 ‘엡스타인 파일’에서 두 사람의 접촉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더 잦고 긴밀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이메일 기록이 다수 확인되면서다.
영국 일간 The Guardian은 3일(현지시간) 보도에서, 2019년 2월 말 엡스타인이 자신의 변호사 겸 언론 대응 담당자에게 보낸 이메일을 소개했다.
해당 이메일에는 “촘스키로부터 받은 조언”이라는 전언이 포함돼 있는데, 요지는 언론과 대중의 비판에 대해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내용이다. 다만 이 조언은 엡스타인의 주장에 근거한 전언일 뿐, 촘스키가 직접 보낸 이메일 등 1차 자료로 확인된 바는 아니다.
공개된 전언에 따르면 촘스키는 당시 “여성 학대 의혹을 둘러싼 히스테리가 극단으로 치달아, 이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중범죄처럼 취급되는 상황”이라며 무대응 전략의 이유를 설명했다는 취지의 문구가 포함돼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세계적 석학의 이름이 엡스타인의 위기관리 맥락에서 거론됐다는 점만으로도 파장은 커지고 있다.
배넌 연락처·사교 모임 정황 포함
자료에는 촘스키가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백악관 수석전략가였던 스티븐 배넌과의 만남을 타진하며 엡스타인에게 연락처를 요청했다는 설명도 등장한다. 엡스타인이 매개가 됐다는 정황은 촘스키의 대외 네트워크 형성 방식에도 의문을 낳고 있다.
또 2016년 무렵 엡스타인과 촘스키 부부가 만남을 계획·진행한 흔적도 이메일로 남아 있다. 엡스타인은 촘스키에게 “늘 그렇듯 즐거웠다”며 뉴욕 혹은 카리브해 방문을 언급했고, 촘스키는 “발레리아는 뉴욕을 좋아하고, 나는 카리브해 섬을 상상하곤 한다”고 답했다.
같은 해 다른 이메일에서는 엡스타인이 “우디만 빼고는 시내 사람들이 다 떠나 있을 것”이라며 재차 모임을 제안했고, 촘스키가 “앨런네와의 저녁식사”를 언급한 답장을 보낸 대목도 확인됐다. 이를 두고 영화인 우디 앨런과 그의 아내를 가리킨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유전자검사 키트·돈세탁 자문 의혹
엡스타인이 유전자검사업체 23andMe로부터 받은 2016년 발송 기록에는 우디 앨런·순이 프레빈 부부에게 검사 키트가 보내졌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별도의 이메일에서는 엡스타인의 당시 연인이었던 카리나 슐리악이 2017년 봄, 촘스키 부부에게도 검사 키트 두 세트를 보내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앞서 공개된 자료에는 촘스키가 아파트 구입과 자녀 재산 분배 등 개인적 재무 문제에 대해 엡스타인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전언도 담겼다. 촘스키의 배우자 발레리아 워서먼 촘스키가 엡스타인의 직원에게 언어학 관련 사업 지원을 요청하며 2만 달러 수표 발송을 지시했다는 기록 역시 논란을 키우고 있다.
‘학문적 거장’의 어두운 그림자
촘스키는 인용지수와 학문적 영향력 면에서 살아 있는 학자 가운데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아 왔다. 그는 MIT대학에서 2002년 은퇴 후 명예교수로 남았고, 2017년부터 아리조나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수십 년간 미국 좌익 진영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도 명성을 쌓아왔고, 한국의 소위 진보세력에게도 큰 영향력을 발휘해온 만큼, 엡스타인과의 교류 정황은 지적·도덕적 신뢰에 대한 질문으로 번지고 있다.
한편 엡스타인의 유산을 둘러싼 후속 논란도 이어진다. 그의 마지막 연인으로 알려진 카리나 슐리악이 유언장에 따라 거액의 상속 대상으로 지정됐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피해자 보상과 세금 납부 등으로 실제 집행 규모는 크게 줄어든 상태다.
이번 추가 공개 문서는 촘스키가 엡스타인의 범죄에 관여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 석학의 이름이 엡스타인의 사교·위기관리·사적 거래의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권위와 윤리적 책임의 경계에 대한 논쟁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안·두·희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