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45] 미니애폴리스의 광기
  • 리엘 레이보비츠 Liel Leibovitz is editor at large for Tablet Magazine and senior research fellow at the Hudson Institute. 허드슨 연구소 선임연구위원

  • 요즘처럼 뉴스의 순환 속도가 숨 가쁠 정도로 빠른 시대에는, 어떤 하나의 사건을 “분수령”이라 규정하려는 유혹을 경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러한 자제는 점점 더 유지하기 어려워 보인다. 미네소타에서 간호사 알렉스 프레티가 1월 24일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은, 어쩌면 바로 그런 대격변적 사건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사건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또 다른 반(反) 이민세관단속국(ICE) 시위자였던 르네 굿이 1월 7일, 연방 요원의 지시에 불응하고 차량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뒤 총격으로 사망했을 때만 해도, 공적 논쟁의 초점은 주로 굿이 자신의 혼다 파일럿 차량으로 요원을 들이받으려 했는지 여부를 가려내는 데 있었다. 며칠 동안 소셜미디어와 언론은 여러 각도에서 촬영된 영상을 공유했고, 격렬하긴 했으나 논쟁의 중심에는 굿의 명백한 유죄 또는 무죄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티의 죽음에는, 결국 진실이 규명될 것이라는 그러한 전제가 따라붙지 않았다. 총을 소지했던 프레티가 언제 무장을 해제당했는지와 같은 개별적 쟁점이 일부 논의되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사실보다는 감정이 지배했다.

    나는 여러 날에 걸쳐 프레티 사망 사건에 대한 반응들을 수집했다. 공개 게시물에서부터 왓츠앱 단체방과 문자 메시지로 오간 사적 대화에 이르기까지, 출처는 다양했다. 아래에 인용하는 사례들은 단순한 표본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이제는 충분히 컸다”고 한 중년 남성은 친구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아이들은 나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민주주의와 자유 없이 살 수는 없다. 나는 아이들이 미국이 독재적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결코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한 교외 지역의 어머니는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썼다.
    “내전 징집 준비 완료. 연방 범죄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불사할 것이다.”

    또 다른 아버지는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가해자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나치에게 했던 것처럼 반드시 정의의 심판대에 세울 것이다. 우리는 단지 정의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복수를 원한다.”

    이러한 발언을 한 사람들, 그리고 이들과 다르지 않은 수많은 이들은 광기 어린 급진주의자들이 아니다. 이념에 취해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철없는 대학생들도 아니고, 혼란을 목적으로 삼는 직업적 선동가들도 아니다. 굿과 프레티처럼, 이들은 안정된 직업과 사랑하는 가족을 둔 책임 있는 성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 나라는 위대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자유로운 나라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정부 정책에 대해 항의할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불법 체류 범죄자를 체포하고 추방하려는 합법적 시도를—프레티가 방해하려 했던 바로 그 대상, 가정폭력과 난동 전과를 지닌 에콰도르 국적자 호세 우에르타-추마에 대한 조치를—게슈타포의 범죄와 동급으로 묘사하는 것은, 더 이상 정당한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광기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일부 평론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 미국 교통부 장관 피트 부티지지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가면을 쓴 군사화된 정부 요원들”이 “정치적으로 불복종하는 지역들”을 처벌받지 않은 채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며, 이에 맞서 미국인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주당의 특정 주들이 연방 정부의 권위를 무시할 권리가 있다고 여겼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이 나라를 부끄러움 없이, 그리고 주저함 없이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하나의 난제가 남는다. 이 광기를 어떻게 멈출 것인가?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직면한 병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위기도, 정파적 도전도 아니다. 이것은 전면적인 영적 위기다.

    안정된 직업과 주택담보대출, 수많은 책임을 지닌 평범한 부모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연방 요원들의 정당한 임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이는 단순히 언론이 수년간 대통령을 불법적 폭군으로 묘사하고, 합법적이고 전례가 있는 정책들을 파시즘으로의 추락이라고 규정해 온 선전의 결과만은 아니다. 진실은 그보다 훨씬 깊고, 훨씬 더 고통스럽다.

    굿과 프레티가 속한 세대, 즉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일련의 약속 속에서 성장했다.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너도 미국의 꿈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는 이들이 한창 소득을 올려야 할 시기에 닥쳤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광범위한 하향 이동이 발생했다. 1930년대 출생 남성들 가운데 60퍼센트가 부모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았던 반면, 2019년 스탠퍼드대 조사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출생자 중에서는 단 44퍼센트만이 부모보다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렸다.

    이 불행한 현실에서 위안을 찾기 위해 교회로 향해 보라. 예전처럼 신자석은 가득 차 있지 않다. 책이나 TV 프로그램 같은 전통적 위안의 원천으로 눈을 돌려 보라. 그것들마저 오락보다 재교육에 더 관심을 두는 급진주의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친구들은 인터넷 음란물, 합법화된 마리화나, 스포츠 도박, 그 밖의 자기파괴적 행태에 빠져 있다.

    혼인율은 급락했고, 출산율은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약물 과다복용이나 자살로 인한 ‘절망의 죽음’이 매년 수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순수하고 정의롭게 느껴지는 무언가를 갈망하며, 정치—그것도 시민적 참여의 의미를 넘어선, 영웅적 덕을 가장한 급진적 정치—에서 의미를 찾으려 드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인가? 특히 정치인들과 자금이 풍부한 비정부기구들 같은 냉소적 행위자들이 이를 부추길 때 말이다.

    이제 두 번째, 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어려운 단계에 이른다. 동료 시민들을 이 영적 수렁에서 건져내고, 파괴적인 급진적 분노의 덫에서 구해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붙들어야 한다.

    우리의 첫 반응은—언제나, 언제나, 언제나—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친구와 이웃을 집어삼키는 분노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크고 깊게 연민과 공감을 키워야 한다. 설득이나 논증, 이성적 설득으로가 아니라, 따뜻함으로 그들과 관계해야 한다. 과도하게 정치화된 세계 바깥에, 더 크고 의미 있는 관계의 세계가 있음을 상기시켜야 한다. 상상의 미래 구원을 위해 순교자가 되지 말라고 권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형제자매로서, 부모와 자녀로서, 친구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급진화된 이웃을 앉혀라. 커피 한 잔을 따라주어라. 우스운 농담 하나를 건네라.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를 나누라.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은총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시간을 가져라. 이것보다 더 삶에 뿌리내리게 하고, 더 위로가 되며, 더 본질적인 것은 없다.

    이것이 항상 효과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언제나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더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 어쩌면 다수와의 단절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일이지만, 내전을 옹호하거나 예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1861년과 같은 분열이 아니라, 훨씬 덜 유혈적인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분기를 말하고 있다. 미국은 언약적(covenantal) 국가이며, 우리는 대략 한 세기에 한 번씩 그 언약을 새롭게 한다. 이 쇄신을 위해, 우리는 근본 원칙에 대한 헌신을 더욱 굳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해 끌어안으려 했던 이들이 다른 길을 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음은 분명하다.

    인간의 자유가 그러하듯, 그들이 의로운 분노라는 화려한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단호하고 신속하게 그들을 거부해야 한다. 언약적 일치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있는 척할 수는 없다. 완고한 이웃을 달래기 위해 우리 국가의 핵심 덕목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우리는 긴장을 낮추자, 확전을 막자, 대화를 하자라는 호소를 듣게 될 것이다. 그중 일부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진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논쟁은 이러저러한 정책의 합법성이나 효율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영혼에 관한 문제다.

    나는 하느님과 미국, 그리고 희망찬 미래를 믿는 이들의 편에 서 있다. 우리는 이 순간에 응답하여, 공동의 병고를 치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포용의 전략을 추구하라. 우리가 여전히 공유하는 기쁨과 희망, 신념으로 대화를 되돌리려 노력하라. 그러나 동시에, 허위의 타협이 주는 순간적 안락함을 위해 우리의 핵심 덕목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자. 길을 잃은 이웃을 끌어안되, 그들의 급진주의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는 강철 같은 분명함을 가지고서 말이다.

    이것은 막중한 과업이다. 모든 언약적 쇄신의 순간은 언제나 그러했다. 그러나 미국 건국 250주년을 맞이하는 이때, 우리는 앞서 걸어간 이들의 모범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서로의 차이를 평화롭게 해결하려는 연민을 동포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기를 신뢰하자. 그리고 흔들림 없이 이 나라의 핵심 가치를 수호할 용기를 갖자. 이제 우리의 차례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6-02-10 08:08]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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