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비오 10세회(SSPX)가 최근 교황의 승인 없이도 7월에 새 주교들을 서품할 계획이라고 발표한 것은, 바티칸의 지침에 거슬러 계속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집단, 곧 독일 교회와의 불가피한 비교를 불러일으킨다.
최근 몇 년 동안 바티칸과 SSPX는, 그 단체가 도대체 교회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아무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는 듯 보였다. 이는 로마 특유의 실용주의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사례이다. 반면 독일 교회의 경우에는 다른 종류의 실용주의가 작동해 왔다. ‘시노달의 길’은 2023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지만, 그 유산을 상설 국가 시노달 회의라는 또 하나의 숙의 기구로 제도화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독일의 절차나 그 결과에 대해 결코 전적으로 확신하지 못했으며, 레오 14세 교황이 어떻게 대응할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독일 주교들 내부에서도 이 새로운 구조의 목적과 권한을 두고 의견이 갈려 있다. 지금까지 로마가 취해 온 온건한 개입은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시노달리타스”라는 개념이 사람마다 매우 다른 의미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법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비는 분명하다. SSPX는 불안정하고 모호한 교회법적 지위에 놓여 있는 반면, 독일 주교들은 교회의 법적·제도적 구조 안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두 집단 모두 문제적 방식으로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다. SSPX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시작되는 공식 교회 문헌에 도전하며, 독일 주교들은 자신들을 공의회 유산의 주된 수호자이자 해석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독일 측이 보편 교회를 공의회의 더 깊은 수용으로 이끌 사명을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SSPX 역시 교회의 교도권과 교회법을 조건부로 수용할 권리를 주장한다. 현재 이 두 진영은 서로 실질적인 소통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황과의 건강한 관계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순명은 긴장되어 있고, 선택적이거나 도구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규모와 신학적 지향에서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집단은 유사한 사고 패턴을 보인다. 오늘날의 많은 운동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일종의 ‘Algorithmic Echo Chamber (기존 신념을 뒷받침하는 내용만 선별적으로 제공하는 현상)’에 갇혀 있는 듯하다. 내부적으로는 다양성이 있지만, 강한 이념적 경계로 결속되어 있다. 체스터턴이 말한 “완전하지만 좁은 원”이라는 비유가 떠오른다. 양측 모두 수십 년에 걸쳐 이러한 원을 구축해 왔다. 전례는 이 갈등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지만, 유일한 문제도 아니며, 가장 결정적인 문제도 아니다.
일부 견해와 달리, 어느 쪽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극단적이고 상반된 해석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SSPX가 곧 공석주의(sedevacantism)와 동일한 것은 아니며, 독일 주교들도 노골적인 현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두 집단 모두에서 지배적인 이념적 경계를 넘어가려는 이들은 저항에 직면한다. 교회 안에는 굳어진 정체성들이 존재한다. SSPX는 초(超)정통적 평판을 수호하며, 독일 교회 지도자들은 자유주의적 경향을 띠는 학계 신학자들과 여론의 비판에 민감하다.
그럼에도 교회적 경험의 대비는 중요하다. SSPX는 정상적인 교회 생활로부터 상당 부분 물러나 있는 반면, 독일 주교들은 현대 교회 현실의 복잡성을 온전히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시노달의 길 안에서는 진정으로 전통적인 목소리가 거의 부재했다. 온건한 관점들조차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고, 보다 급진적인 개혁 제안들이 과도하게 가시성을 얻었다. 또한 양측 모두 다리를 놓는 시도에 깊이 저항한다. 종교 자유나 전례 개혁을 언급하면 전통주의적 경보가 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재평가나 동향례(ad orientem) 거행을 제안하면 교구 관료 체계는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경멸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이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자기 강화적 패턴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는 교리와 법을 선택적으로가 아니라 일관되게 집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호하고 비효율적인 장치에 의존하기보다 교회법에 이미 규정된 제재를 포함한 교회법적 개입을 재고하는 것이 과연 비합리적인가?
또 다른 길은 강력하고 정직한 포용일 수 있다. 이는 두 진영을 서로를 포함한 교회의 전체 스펙트럼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SSPX와 독일 교회는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미해결 긴장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SSPX를 단순한 주변적 호기심으로 축소하는 것은 오류이며, 독일 교회를 그 가장 기이한 공개적 표현과 동일시하는 것도 오도이다.
지금까지 로마의 대응은 대체로 지연이었다. 이는 이해할 만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유사한 긴장이 로마 교황청 내부에도 존재하며, 점점 더 이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적·기술 관료적 “사목 관리” 전략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위로부터 관리될 수 없다. 이는 권위가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계제도가 흔히 암묵적으로 부여받는 전능성을 실제로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능성을 기대하는 태도 자체가 제1차 및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부분적으로 충분히 성찰되지 않은 유산이며, 이제 ‘관리되는 시노달리타스’라는 기치 아래 다시 나타나고 있다.
더 깊은 문제는 일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너무 자주 일치는 “상대가 나와 더 비슷해지는 것”으로 상상된다. 이는 양측 모두에서 드러나는 유혹이다. 탈근대 상황 속에서 교회의 작동 방식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한때 유망해 보였던 전략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부와 그 수용 과정조차, 이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제한적으로 보인다. 이는 무비판적 지속의 순간도 아니며, 반동적 퇴각의 순간도 아니다. 오히려 공의회의 한계와 변화하는 세계와 교회가 맺어 온 더 넓은 관계에 대해 정직하게 성찰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성경적·전통적 요소들을 마음대로 재구성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인위적으로 설계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교회가 전례 논쟁에 집착하는 데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그러한 집착 역시 하나의 성직주의이다. 교리적 일치는 참된 신학적 다원성을 필요로 하며, 이는 독일 학계 신학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곳은 종종 제도적 집단사고에 의해 형성된다. 동시에 교계의 권위—교황적, 주교적, 공의회적, 시노달적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다. 교회 쇄신은 정책 입안과 유사한 상향식 행정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살아 있는 전통이다. 이는 일관되고 유기적이며 고갈되지 않는다. 어떤 요소들은 변하지 않으며, 다른 요소들은 서서히, 유기적으로 발전한다.
교회적 에코 챔버를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선교이다. 복음화는 교회의 본질적 목적이며, 내적 쇄신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촉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했듯이, 독일의 시노달의 길이 난관에 봉착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근본적 사명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 개혁—전례적이든 그 밖의 것이든—은 중앙집권적 통제보다는 인격적 만남, 점진적 회심, 유기적 성장으로부터 더 많이 생겨난다.
교회 안에서 누구도 거룩한 전통을 마음대로 재형성할 권한도, 그것을 고정시켜 정지시킬 권한도 없다. 필요한 것은 회심과 겸손이다. 오직 이것만이 분열을 극복하고 실현 가능한 미래를 열 수 있다. 독일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서, 다리 놓기는 더 이상 ‘전통에 대한 배신’이나 ‘진보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겸손은 모두에게 요구된다. 주교와 교황의 권위를 회피하는 이들, 교리와 전통을 사소화하는 이들, 그리고 교황주의·공의회주의·시노달리타스의 한계를 부정하는 이들 모두에게 요구된다. 아우구스티노적 교황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같은 분이신 겸손한 중재자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회심의 기회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