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59] 내가 노트르담에 머무르는 이유
  • 존 오칼러헌 John O’Callaghan is associate professor of philosophy at Notre Dame. 철학과 교수

  • 나는 1984년 이래로 노트르담 대학교와 인연을 맺어 왔다. 처음에는 수학 대학원생으로, 그다음에는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있었다. 2003년에는 철학과 종신교수가 되었다.

    초등학교 첫 3년을 제외한 나의 전 교육 과정은 가톨릭 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아마도 나는 노트르담과 같은 곳에서의 가톨릭 문화와 지적 삶의 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버드, 예일, 듀크, 노스웨스턴, 스탠퍼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등과 같은 곳에서 충분한 비교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년 동안 친구들이나 예비 학부생의 부모들이 “노트르담은 어떤 곳인가?”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해 왔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노트르담 대학교가 가톨릭 공동체로서 독특한 점은, 이곳이 진정으로 가톨릭 교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이다.”

    보편 교회를 보라.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이곳 노트르담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교파, 민족성, 인종, 성별뿐 아니라 정치, 문화,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모든 것—어쩌면 죄스러운 순간에는 미워하기까지 하는 것들—이 이곳에도 존재한다. 한때 워커 퍼시는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을 비판하며 “죄인들로 가득 찬 교회”라고 말하던 가족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가톨릭 교회는 죄인들이 있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죄인들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교회와 노트르담에서 사람들이 실수를 하는가? 그렇다.
    교회와 노트르담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가? 그렇다.
    교회와 노트르담에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가? 그렇다.
    교회와 노트르담 안에서 웃음과 기쁨을 발견하는가? 그렇다.
    교회와 노트르담 안에 품위 있고 선하며 거룩한 남녀가 있는가? 그렇다. 나는 이곳만큼 그런 이들을 많이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노트르담에서 가톨릭 신자가 아닌, 곧 개신교인, 유대인, 무슬림, 불교도, 심지어 무신론자들 가운데서도 품위 있고 선하며 거룩한 사람들을 만났다. 또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인종과 민족 출신의 이들을 만났다. 교회와 노트르담에 대해 부당한 분노를 드러내는 동료와 친구들도 있는데, 그 분노는 나를 아프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정당한 분노는 나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교회와 노트르담 사이에는 많은 대칭성이 있지만, 동시에 깊은 비대칭성도 있다. 가톨릭 교회는 지구 곳곳에 존재하지만, 노트르담에는 지구 곳곳이 모여 있다.

    이제 누군가는 내가 노트르담 공동체의 사회적·문화적 측면만을 묘사하고 있으며, 가톨릭 고등교육기관이라는 본질적 특성은 제쳐두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나는 오직 나 자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전 생애를 하나의 소명으로서 지적 삶을 추구해 왔다. 그 지적 삶은 가톨릭 교회의 지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교회처럼 그 바깥의 문화와도 대화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토미스트, 곧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세속 철학과 대화시키려는 사람이다. 나의 다소 좁다고 할 수 있는 학문적 전문성을 고려할 때, 나에게 노트르담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다. 아퀴나스 사상을 연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국 내 상위 약 20개 철학과 중 하나에서 내가 채용될 수 있는 곳은 오직 노트르담뿐이다.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다.

    우리 학과 안에서 나는 현대 철학의 다양한 흐름들을 매우 높은 수준에서 접한다. 그것들은 내가 대화하려는 대상이며 동시에 나 자신의 사유를 더욱 깊게 만들어 준다. 나의 좁은 전문 분야를 넘어 보더라도, 노트르담은 귀 기울이는 이들에게 풍성한 지적 자극과 성장을 제공한다.

    나는 구약 성경 학자와 함께 시가를 피우고 버번을 마시며, 그에게서 구약의 이야기 구조를 배운다. 또 다른 신학자—선하고 거룩한 사람—에게서 나는 시의 미학, 특히 많은 이들이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종교적 시 미학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역사학자 친구들로부터는 종교개혁사, 미국 건국사, 심지어 권투에 대해서까지 배웠다. 헌법학자들, 계약법 연구자들, 주택 정책 전문가들, 생명윤리학자들, 국제 인권 연구자들과도 오랜 시간 토론할 기회를 가졌다.

    공학자인 친구에게서는 오레오 쿠키 한 개에 들어 있는 탄소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것만으로 자동차를 얼마나 멀리 움직일 수 있는지 배웠다. 과학자 친구들과는 사실과 이론의 본성에 대해 논쟁했고, 사회과학자 친구들과는 인간 행위의 동기 구조에 대해 토론했다. 도시계획가 건축가와 고전주의 건축가가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를 두고 나누는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목록은 끝이 없다. 나는 이 모든 이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물론 내가 방금 언급한 지적 삶의 각각의 요소는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철학자, 신학자, 역사학자, 법학자, 과학자, 사회과학자, 건축가는 다른 대학들, 특히 이른바 “위대한” 세속 대학들에도 존재한다. 경험이 부족하기에, 그러한 대학들에서 이처럼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지적 교류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겠다.

    그러나 풍부한 경험에 근거하여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경이로움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는 그러한 풍요가 노트르담에 있다.

    노트르담은 완전한가? 아니다.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와 마찬가지다.
    노트르담에 문제가 있는가? 있다.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와 마찬가지다.
    노트르담이 실수를 하는가? 그렇다.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와 마찬가지다.
    노트르담에서 부를 추구하는 모습이 때때로 그 지적·사회적 은총을 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가? 그렇다.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가? 그렇다.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와 마찬가지다.
    노트르담의 재정적 풍요가 그 구성원들의 지적 삶을 섬기는가? 그렇다.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와 마찬가지다.

    만일 누군가 노트르담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결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를 사랑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는 노트르담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나처럼.

    모든 사람이 노트르담에 있을 필요는 없다. 가톨릭 신앙을 살아내는 길은 여러 곳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이곳에 머무는 이유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6-02-24 08:00]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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