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60] 주교들은 교회의 온전한 이민 교리를 되찾아야 한다
  • 켈시 라인하르트 Kelsey Reinhardt is president of CatholicVote. 가톨릭보트 대표

  • 국경을 통제할 수 없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다. 이 진술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파적 구호가 아니라 정치 공동체의 기본적인 도덕 원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년 동안 많은 충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의 이민에 관한 가르침이 단 하나의 명령으로 시작하여 거기서 끝나는 것처럼 인상을 받아 왔다. 곧 “이방인을 환대하라”는 것이다.

    이제 미니애폴리스와 같은 지역의 기온이 내려가고, 국가적 논의가 종말론적 과장 대신 보다 구체적인 방향으로 전환되는 이 시점은, 참된 교리 교육을 위한 기회의 창이다. 바로 이때에 우리 주교들은 앞으로 나와, 나라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곧, 온전한 구조를 갖춘 이민에 관한 가톨릭 사회교리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이다.

    가톨릭 교리는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야 할 강력한 이유들을 종종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인정한다. 폭력, 부패, 박해, 경제적 붕괴, 가족에 대한 의무 등이 그 예이다. 교회는 언제나 이주민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가톨릭 교리는 또한 교회 내 메시지에서 흔히 축소되거나 간과되는 또 다른 원리를 분명히 한다. 곧 정치적 권위는 공동선을 위하여 이주를 규제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외 조항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도덕적 구조의 일부이다.

    국가는 자선(caritas)의 적이 아니다. 국가는 질서, 정의, 평화, 그리고 국민의 보호—혼란을 틈타 번성하는 범죄자들로부터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일까지 포함하여—를 맡은 실제적 도덕 행위자이다.

    만일 주교들이 이주민의 떠날 권리와 그리스도인의 도울 의무만이 확정된 교리인 것처럼 말하면서, 법 집행을 원천적으로 도덕적 의심의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혼란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면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충실성과 법의 중요성에 대한 기본적 신념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교리 교육의 실패이다.

    주교들은 가톨릭 교리가 실제로 허용하고 요구하는 바를 명확히 천명함으로써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 곧, 국가는 “예”라고도 말할 수 있고 “아니오”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결정은 공동선에 질서 지워지고, 수용 능력에 비례하며, 정의에 유의할 때 도덕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의 집행 방식이 도덕적 평가를 초월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교들은 집행의 “방법(how)”에 대하여 질문할 자유와 도덕적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만일 집행 조치가 무모하거나, 굴욕적이거나, 무차별적이거나, 가정과 공동체에 불필요하게 파괴적이라면, 교회는 이를 지적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그리고 실수가 발생할 때—실수는 발생할 것이다—교회는 투명성, 시정 조치,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해야 한다.

    주교들이 신뢰성과 결실을 가지고 발언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적이다.

    첫째, “방법”에 대한 비판이 “이유(why)”에 대한 우회적 부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모든 집행 수단이 본질적으로 잔혹한 것으로 묘사된다면, 실질적 결과는 도덕적 위압에 의한 국경 개방뿐일 것이다. 그것은 가톨릭 교리가 아니라 이념적 태도이다.

    둘째, 비판은 법을 집행하는 데 필요한 합법적 정부 수단을 악마화하지 않아야 한다. 진지한 사회는 분위기나 보도자료만으로 이민법을 집행할 수 없다. 조사, 구금 시설, 사법적 심리, 추방, 기관 간 협력이 필요하다.

    가톨릭 신자들은 특정 정책의 신중성과 안전장치에 대해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 지도자들이 집행 인프라 자체의 존재를 비도덕적인 것처럼 말한다면, 그들은 인간 존엄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국가에 허용하고 또한 요구한다고 가르치는 역할 수행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남용(abuses)을 단죄하는 것과 집행 자체를 단죄하는 것은 다르다. 주교들은 이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충동적으로, 광범위한 주교단 협의 없이, 그리고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발표되는 격앙되고 대체로 과시적인 비판은 “권력 앞에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정치적 진영을 더욱 경직시키며, 사목적 명료성 대신 허세를 부리게 만들 뿐이다.

    2000년에 당시 볼로냐 대교구장이었던 자코모 비피 추기경이 행한 주목할 만한 연설은, 교회의 많은 성명이 회피하는 일을 수행한다. 그는 이민을 감상적 즉흥이 아니라 현실주의, 신중성, 계획을 요구하는 복합적 사회 현실로 다루었다. 그는 이주민을 위협으로 만드는 경보주의와, 대규모 이주가 아무런 결과 없이 흡수될 수 있다고 가장하는 순진한 이상주의라는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하였다.

    그러나 비피 추기경 연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교회 자신의 유혹에 대한 내부적 비판일지 모른다. 교회는 법적 지위와 무관하게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모든 사회적 위기의 만능 관리자가 아니다. 복음화는 사회복지 서비스로 대체될 수 없다.

    미국 주교들은 지금 바로 그런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이는 어느 정당이나 정치인, 정책 패키지를 세례 주기 위함이 아니라, 가톨릭 교리를 그 온전한 깊이로 회복하기 위함이다. 목표는 잔혹함도 혼란도 아니다. 목표는 질서 있는 자비(ordered compassion)이다. 곧, 이주민의 존엄을 보호하면서도, 누가, 어떤 조건 아래, 어떤 수로 입국할지를 규제할 국가의 권리와 의무라는 도덕적 현실을 존중하는 체계이다.

    주교들이 이 온전한 교리를 되찾는다면, 그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다시 가톨릭 신자답게 행동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념적 공황에 사로잡히지도, 감상주의에 마비되지도 않고, 이성과 계시, 그리고 교회의 오랜 지혜에 인도받는 신앙인으로서 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6-02-25 07:25]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 다른기사보기 리베르타임즈 기자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