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스티노 카사롤리 추기경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교황청 국무원장을 지냈으며—그 이전에는 바오로 6세 교황의 동방정책(Ostpolitik)의 설계자이자 수석 외교 담당자였다—내가 『희망의 증인』이라는 요한 바오로 2세 전기의 제1권을 위해 그를 인터뷰하려 했을 때 처음에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그 추기경은 내가 1992년에 출간한 『최후의 혁명: 저항하는 교회와 공산주의의 붕괴』를 반기지 않았다. 나는 그 책에서, 공손하려 애쓰기는 했지만, 철의 장막 뒤 공산 정권들과의 타협 전략을 취한 동방정책을 분명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결국 추기경은 나와 대화하기로 동의했고, 우리는 한 시간 반이 넘도록 훌륭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기지와 매력이 넘쳤으며, 과거 폴란드의 논쟁 상대였던 스테판 비시니스키 추기경에 대해서도 진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카사롤리 추기경은 나를 마음에 들어 한 듯 보였고, 두 번째 면담을 위해 다시 오라고 권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는 선종하였다. 그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빈다.
카사롤리는 1979년 6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첫 폴란드 사도적 순방 조건을 협상하는 데 능숙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공산 당국이 교회 측에서 처음 제안한 5월의 짧은 방문 대신 6월의 9일간 방문에 동의하도록 이끌어냈다. 공산 당국이 5월 일정을 거부한 이유는, 그 시기가 국가 권력에 맞서 순교한 성인인 성 스타니슬라오의 전례 축일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성인의 모범은 당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79년 6월의 방문이 시작된 이후, 카사롤리는 6월 2일 바르샤바 승리 광장에서의 교황의 유명한 강론(그곳에서 교황은 성령께 “이 땅의 지면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간구하였다)과 6월 3일 그니에즈노 연설(슬라브 민족들, 더 나아가 동서 유럽 전체의 영적 일치를 천명한 연설)에 대해 공산 당국이 표한 불만을 달래려 했다.
동요한 관리들에게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교황은 “감정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바티칸 외교관은 암시했는데, 그가 다소 지나치게 폴란드적이며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인지한 요한 바오로 2세는 6월 5일 체스토호바에서 폴란드 주교단 상임평의회(7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기구)의 특별 회의를 소집했다. 교황을 수행하던 카사롤리나 다른 어떤 교황청 인사도 이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는 녹음되었고, 2025년 말 나는 그날 논의를 요약한 각서를 전달받았다. 이는 주교회의 총무였던 브로니스와프 돔브로프스키 주교가 작성한 문서로, 수십 년 동안 바르샤바 대교구 문서고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한 발언들은, 공산 정권을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의 통찰력과—아고스티노 카사롤리를 포함한 교황청 내부의 많은 이들의 몰이해를—새로운 빛 아래 드러낸다. 교황이 언급한 요점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 교황청에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에 관한 “전문가들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공산 체제하에서의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부족했다.”
★ 자신은 폴란드를 방문함으로써 공산 당국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방문이 그들이 “받을 자격이 없는” 정권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나는 카사롤리에게 계속 설명하고 있다.”
★ “우크라이나인들은 존중받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 [교황청은] 일치운동(곧 러시아 정교회와의 관계)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역사적 진실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 …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파괴는 범죄이다.”
★ 폴란드 순방은 지정학적으로 “전 지구적 의미”를 지녔으며, 신앙에 기초한 폭정 저항이라는 폴란드의 경험은 온 세계 교회 전체에 “필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폴란드 수석 대주교 역시 예리한 통찰력, 나아가 예견력을 보여주었다. 비셴스키 추기경은 교황의 발언에 응답하여, 교황 순방은 이미 “일종의 돌파구”라며, “이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각성이다 … 이 민족들의 희망의 부활이며 … 일종의 영적 동원”이라고 말했다.
대화 말미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직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과정이 진행 중이다. 곧 정치적 소외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 그러니 어떤 변화들이 오고 있다.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그 변화들은 1989년에 도래했다.
그러나 오늘날 교황청 일부와 이탈리아의 진보적 교회권 내 특정 집단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카사롤리 추기경의 동방정책 외교가 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열쇠였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1979년 6월, 폴란드 주교단 상임평의회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언급한 바—가톨릭 교회는 “자기 자신의 힘”, 곧 영적 힘으로 강할 때 폭정에 맞설 효과적인 무기를 지닌다는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되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을 바라볼 때 더욱 그러하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