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73] 전쟁에 한계는 없는가?
  • 피터 J. 레이하트 Peter J. Leithart is president of the Theopolis Institute, Birmingham, Alabama. He posts regularly at his Substack, Notes from Beth-Elim. 테오폴리스 연구소 소장

  •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 이번 군사 행동은 그리스도교의 ‘정의로운 전쟁(Just War)’ 이론의 기준을 충족하는가? 여러 관찰자들이 이 질문을 제기했다. 편집장 리노를 포함한 일부 논자들이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리노의 말이 옳다.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단순한 체크리스트가 아니다. 복잡한 도덕적 판단에 내재한 불확실성을 건너뛰게 해주는 기계적 기준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 경우에 대한 대답은 분명한 “아니오”라고 생각한다.

    정의로운 전쟁은 명확하고 달성 가능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메시지는 - 도덕적 논증은 아닐지라도 - 정치적 메시지 차원에서 혼란스럽다.

    우리는 합리적인 성공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미국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군수 물자를 소진할 위험에 처해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란의 군사적 능력과 결의 - 특히 하메네이 사망 이후 - 를 과소평가한 반면, 이란 내부 반대 세력이 쿠데타에 나설 의지는 과대평가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혹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왕처럼 행동한 것은 아닌가? 그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비용을 계산하지 않았다. (루카 복음 14,31–33 참조)

    이번 공격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행정부가 아니라 논평가 탄비 라트나와 같은 인물들에게서 나왔다. 그는 이 전쟁을 지정학적 전략 변화의 새로운 단계로 본다. 즉, 세력 균형 현실주의, 혹은 윌슨주의적 이상주의에서 벗어나 “경제 시스템 보호” 중심으로 이동하는 변화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폭격을 하거나 병력을 투입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거나 세우기 위해서도 아니고, 동맹국을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부정의에 대한 응징을 위해서도 아니고, 폭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심지어 세계적 적을 패배시키기 위해서조차 아니다

    대신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전쟁을 수행한다. 자원이 풍부한 국가에 우리가 선택한 통치자를 세우기 위해, 에너지 공급의 자유로운 흐름을 보장하기 위해, 첨단기술 공급망을 유지하기 위해, 희귀 광물 자원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의존하는 디지털 인프라를 보호하기 위해.. 이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 문제로 군사적 위협을 가한 것과 이란 공격은 동일한 맥락에 있다.

    하지만 어쩌면 커티스 야빈의 냉혹한 현실주의적 평가가 옳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트럼프는 오래전부터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완전히 제거하기를 원해왔고, 지금의 계획은 잔해 속에서 협력적인 지도자가 기어 나올 때까지 폭격을 계속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전쟁을 허용하지 않는다. 부유함을 유지하거나 더 부자가 되기 위해, 이란의 석유 자원과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할 우호적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

    정당한 전쟁 사유에 대한 논쟁은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가릴 수 있다. 그것은 전쟁 수행의 정의에 관한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과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모두 국제적 전쟁 규범에 대해 강한 반감을 보인다.

    헤그세스는 버지니아주 퀀티코 해병대 기지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적에게 압도적이고 가혹한 폭력을 가한다.
    우리는 어리석은 교전 규칙으로 싸우지 않는다.
    우리는 전투원들의 손을 풀어 적을 위협하고, 사기를 꺾고, 추적하고, 죽일 수 있게 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교전 규칙은 더 이상 없다.
    상식, 최대의 치명성, 그리고 전투원에게 권한을 주는 것 - 그것이면 충분하다.”

    트럼프와 헤그세스는 자주 “어리석은(dumb)”, “각성주의(woke)”, “정치적으로 올바른” 전쟁 규칙을 비난해 왔다. 트럼프는 심지어 미국 병사들을 “살인 기계(killing machines)”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공격은 최근에 도입된 교전 규칙을 겨냥한다. 그 규칙들은 미군을 방어적 입장에 놓고 전투의 혼란 속에서 지나치게 손발을 묶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헤그세스는 제네바 협약까지 비판했다. 그의 책 ‘전사들과의 전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우리는 제네바 협약을 따라야 하는가?”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적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 그대로 그들을 대한다면 어떨까? 그것이 그들에게 자신의 야만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알카에다에게 말하겠다.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팔을 뜯어내 돼지에게 먹이로 던져버릴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덧붙였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전쟁을 이기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다른 나라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무슨 상관인가?”

    이러한 발언은 트럼프 행정부가 전쟁을 규칙에 의해 제한되는 행위로 보기는 하는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사실 전쟁법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키케로는 훗날 정의로운 전쟁 전통이 되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때때로 “카르타고는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이 방식은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적용되었고, 이후 예루살렘에도 적용되었다. 로마 군대가 포위된 도시의 방어선을 돌파하면, 그들은 하루 동안 약탈·강간·살해할 권리를 가졌다.

    성경에서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전쟁을 지휘하시는 최고 사령관이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도시들을 공격할 때, 그들은 “숨 쉬는 모든 것”을 죽였다. 도시의 재산은 하느님께 봉헌되었고, 도시는 번제물처럼 불태워졌다. 이러한 헤렘 전쟁(herem)은 가나안 정복 초기에만 제한되었다.

    그 이후 상황에서는 신명기 20장에 규정된 다른 전쟁 규칙이 주어졌다.

    -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제안한다
    - 수락하면 주민들은 강제 노동에 종사한다
    - 거부하면 전투 가능한 남자만 처형한다
    - 여성·어린이·가축은 보호된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강간이 금지되었지만, 전쟁 포로 여성과 혼인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신명기 21,10–14) 또한 하느님은 병사들에게 공성 작업을 위해 과일나무를 베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들판의 나무가 사람이냐, 네가 그것을 포위하겠느냐?” 이 금지는 민간 식량 자원 보호를 암시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쟁에 적용함으로써 구약의 전쟁 이해를 절제했다.
    전쟁은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는가? 또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노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그리스도인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지만, 동시에 적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싸운다. 왜냐하면 적들의 영혼은 교만, 잔혹함, 불의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도 말했다. “비록 정의로운 전쟁이라 하더라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슬퍼해야 한다.” 그리고 살인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권고했다.

    “전쟁을 수행할 때에도 평화를 만드는 정신을 간직하라.
    그리하여 공격한 자들을 정복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평화의 유익으로 인도하도록 하라.”

    미국 국무장관 마르코 루비오의 말처럼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나쁜 일만은 아니다. 기존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 현실주의적 형태든 이상주의적 형태든 - 는 이미 해체되기 시작했고, 일정 부분 붕괴되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세계, 특히 세계 군사 초강대국에게 도덕적 위험을 남긴다. 우리는 여전히 어떤 한계를 인정하는가? 아니면 “똑똑한 대통령”이 시작한 전쟁이라면 정당화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가? 그의 유일한 기준이 자기 자신의 도덕적 나침반 뿐이라면 말이다.

    “각성주의가 아니다(Not woke)”라는 말은 전쟁 수행의 정의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살인을 즐기는 초강대국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제한도 양심도 없이 말이다.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때때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폭력 충동을 법과 규범으로 묶어 두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승리 그 자체가 전쟁의 유일한 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다.

    “한 개인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을 수 있듯이, 국가와 군대도 그렇게 될 수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6-03-10 07:40]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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