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0일, 《퍼스트 싱스》는 사무실에서 에리크 제무르를 초청해 저녁 행사를 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이 행사는 네이선 핀코스키가 영어로 번역한 『프랑스의 자살: 한 나라를 파괴한 조용한 혁명』의 출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제무르의 책이 2014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었을 때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성 해방, 여성의 권한 확대, 유럽연합의 창설, 다문화주의 등 최근 수십 년 동안 사랑받아 온 이른바 ‘성과’들이 실상은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제무르는 202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했지만,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지식인에 더 가깝다. 출간 기념행사에서 그가 한 발언은 내용이 충실했으며, 질의응답에서 내놓은 답변은 한층 더 흥미로웠다. 그 가운데 한 갈래의 사유가 특히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제무르는 산업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 서구 현대정치의 핵심 문제가 이른바 ‘사회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곧 국가는 어떻게 노동의 이해관계와 자본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사회 문제를 더욱 일반적으로 표현한다면, 민주주의 시대 전체를 관통한 문제는 새롭게 주체로 등장한 다수 대중의 힘과 역사적으로 지배적 지위를 누려온 소수 권력자의 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 나라였던 프랑스는 프랑스혁명 이후 1세기가 넘도록 이 사회 문제에 대한 두 가지 해법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었다. 우파는 온정적이고 가부장적인 통치를 회복하자고 제안했다. 책임 있는 소수가 산업자본주의의 잔혹하고 파괴적인 힘을 길들이고 억제함으로써 취약한 다수를 보호하고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좌파는 다양한 해방을 약속했다. 소수를 타도하고 다수에게 힘을 부여함으로써, 다수가 경제적 힘을 통제하고 스스로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대립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제무르는 그날 저녁 행사에서, 21세기의 정치생활을 지배하게 된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정체성의 문제이며, 내가 달리 표현하자면 소속의 문제다. 물론 노동과 자본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보다 더 원초적인 관심사가 전면에 떠오르고 있다.
설명해 보겠다. 공산주의가 국제적 운동을 자처하기는 했지만, 노동과 자본 사이의 투쟁은 각 민족국가의 내부에서 벌어졌다. 노동자와 공장주들이 잠정적인 공존 방식(modus vivendi)을 찾아내거나—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갈등을 벌이던 당연한 현실적 틀이 바로 프랑스와 프랑스의 정치제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폭발적인 쟁점이 되는 것은 프랑스 그 자체다. 프랑스의 국경, 인구 구성, 전통과 생활 관습, 종교가 문제가 되고 있다. 제무르가 지적했듯이, 이는 프랑스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서구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체성의 문제가 부각된 원인을 대규모 이주에만 집중하여 바라보기는 쉽다. 제무르도 『프랑스의 자살』에서 이민 문제를 분명히 다룬다. 그는 다문화주의가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는 사회를 관리하는 기술에 가깝다고 본다. 프랑스인들이 새로운 집단이 유입되고 있으며, 이들이 종종 자신들을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때 생겨나는 불만을 통제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혐오 표현’을 처벌하는 법률은 다문화적 사회관리를 위협하는 목소리를 국가가 통제하고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제무르 자신도 여러 차례 기소되어 유죄판결과 벌금형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작용하고 있는 힘은 이것만이 아니다. 제무르는 『프랑스의 자살』에서 1968년 이후 프랑스의 전통과 생활 관습을 해체한 법률 개정을 주도한 것은 알제리계 무슬림이 아니라 프랑스의 기득권층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개정은 흔히 여성 해방과 성적 자유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었다.
그는 또한 동일한 기득권층이 프랑스 전통에는 없었던 새로운 제도인 법률의 사법심사를 도입했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우파’에 속한 사람들을 포함한 프랑스 엘리트들은 샤를 드골의 경제적 민족주의를 포기하고 유럽연합의 탄생을 도왔다. 이로써 프랑스는 세계 금융권력에 예속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모든 경우에 민족의 정치적 표현인 프랑스 국가는 약화되고 마비되었다. 마침내 프랑스 자체가 수동적인 객체가 되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경제적·문화적·인구학적 힘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자살』은 1970년부터 2010년까지 40년 동안 일어난 의미심장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읽기에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1979년에 일어났다. 두 노년의 지식인, 한때 공산주의 좌파의 거물이었던 장폴 사르트르와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반공 지식인이었던 레이몽 아롱이 당시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던 베트남 보트피플을 지원해 달라고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에게 호소하기 위해 대통령궁을 방문했다.
쇠약해진 사르트르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그러자 아롱이 그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프랑스 언론은 이 장면을 인권을 위한 연대의 위대한 증언으로 묘사했다. 프랑스를 그토록 격렬하게 분열시켜 온 과거의 대립이 극복되는 따뜻한 순간으로 보았다. 제무르도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그 장면의 의미를 더 깊이 들여다본다.
도덕주의가 정치를 대신하고 있었으며, 보편적 인권이 민족국가의 필요를 밀어내고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사르트르와 아롱은 좌우 대립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을 울렸으며, 두 진영이 각자 무엇을 포기하게 될지를 예고했다. 우파는 민족과 국가를 포기했고, 좌파는 민중과 혁명을 거부했다.”
제무르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상 좌우가 하나로 합쳐진 ‘단일정당 체제’의 출범이었다.
우리가 현재의 역사적 고통을 이해하려 애쓰는 가운데,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유용해 보인다. 다수는 소수 지도층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이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제무르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을 이런 식으로 규정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사회 문제의 고전적 형태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 결과 우리는 오늘날의 핵심 쟁점이 소득 불평등이나 주거비, 그 밖의 경제적 역풍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러한 문제가 실재하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새로운 사회 문제, 곧 정체성의 문제와는 직접 맞닿아 있지 않다.
우리는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속해 있는가?
오늘날의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현상 이상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수 대중은 이제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던 자리들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들의 가정과 이웃 공동체, 도시와 문화, 그리고 민족국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며, 이 모든 원인은 서로 맞물려 서로를 강화한다. 세계경제의 거센 충격, 대규모 이주라는 새롭고 경쟁적인 또 하나의 다수 집단, 그리고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 가부장주의, 인종주의, 토착민 우선주의, 식민주의를 비롯한 현대의 온갖 죄악으로 얼룩진 수치스러운 사건들의 긴 목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진보적 도덕주의자들이 그것이다.
다수 대중이 소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해체를 원하고 있다고,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파괴하여 자신들을 뿌리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할 때 포퓰리즘은 더욱 강성해진다.
제무르는 이 불행하고 정치적으로 폭발적인 의혹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19세기 작가 에드가 키네의 말을 인용한다.
“진정한 유배란 조국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다. 조국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조국을 사랑하게 했던 모든 것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