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며 역사가이자 비평가인 마거릿 케네디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1924년 두 번째 소설 『변함없는 님프』(The Constant Nymph)가 출간된 뒤 찬사를 받으며 유명해진 케네디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설 집필을 중단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작품 활동에 복귀해 1967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여러 권의 책을 잇달아 펴냈지만, 이후 사람들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졌고 영문학의 변두리에서 ‘중산층 취향의 대중작가’ 정도로 평가받으며 잊혀 갔다.
올해 초 맥널리는 그녀의 후기 소설 두 권, 『잔치』(The Feast, 1950)와 『트로이 굴뚝』(Troy Chimneys, 1953)을 재출간했다. 이를 계기로 컬럼비아대학교의 라이오넬 트릴링 인문학 교수인 에드워드 멘델슨이 「뉴욕 리뷰 오브 북스」(NYRB)에 길고 호의적인 서평을 실었고, 그는 케네디의 문학적 성취와 위상을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며느리가 『잔치』에 대해 내게—사실 만나는 사람마다—열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이 떠들썩한 재조명의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에 관한 책도 썼던 케네디의 문체는 오스틴을 연상시키는 명료하고 재치 있는 냉소를 품고 있다. 그러나 『잔치』의 시작은 오스틴과 이보다 더 다를 수 없을 정도다.
첫 장에서 우리는 콘월 해안의 절벽 위에 자리한 펜디잭 매너 호텔이 파멸할 운명임을 알게 된다. 겨울 동안 표류하던 기뢰 하나가 떠밀려와 호텔 아래의 동굴에서 폭발하지만, 눈에 띄는 피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몇 달 동안 절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한 전문가는 균열이 조금이라도 더 벌어진다면 호텔을 비워야 한다고 권고한다.
펜디잭 호텔의 소유주이자 운영자인 시달 가족은 그 경고를 무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절벽의 한 면이 무너져 바위투성이 해변으로 쏟아져 내린다. 호텔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시신은 잔해 아래 묻힌다.
첫 장이 끝나면 이야기는 몇 주 전으로 돌아간다. 소설은 이미 정해져 있는 종말을 향해 하루하루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하나의 질문이 놓인다.
‘누가 데려감을 당할 것인가? 누가 남겨질 것인가? 누가 이 묵시록적 재앙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케네디는 잊기 어려운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는다. 시달 부부는 아들들과 함께 호텔에서 살며 호텔을 운영한다. 그중 의사인 제리는 논쟁적인 성격의 랙스턴 캐넌의 소심한 딸 에반젤린, 곧 앤지 랙스턴과 사랑에 빠진다. 랙스턴 캐넌은 일생을 바쳐 영국 성공회에서 앵글로가톨릭주의(Anglo-Catholicism)를 뿌리 뽑으려 해 온 인물이다.
브론테 자매를 소재로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 애나 르셴은 눈부시게 잘생긴 운전기사 브루스와 함께 호텔에 도착한다. 브루스 역시 작가 지망생으로, 『교수형 집행인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쓰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시달 가족의 올곧은 하녀 낸시벨과 날카롭게 대립하지만, 둘의 관계는 점차 깊은 애정으로 발전한다.
또 다른 하녀인 엘리스는 청소나 침대 정리는 뒷전으로 미뤄 둔 채, 독기 어린 정력을 악의적인 험담에 쏟아붓는다.
10년째 서로 소원하게 지내고 있는 헨리 기퍼드 경과 병상에 누워 있는 부인 아이린은 대부분 입양한 자녀들을 데리고 휴가를 왔다. 기퍼드가의 아이들은 헤베가 이끄는 ‘스파르타 클럽’을 운영한다. 헤베는 자기혐오를 지독한 잔인함으로 감추는 아이다.
가난하고 욕심 많으며 속 좁은 코브 부인도 착한 세 딸과 함께 같은 시기에 호텔에 도착한다. 그녀는 기퍼드 가족과 가까워져 딸들이 스파르타 클럽의 일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정도의 간단한 인물 소개만으로도, 아마 호텔이 절벽 아래 망각 속으로 사라질 때 그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인물 몇 명쯤은 이미 골라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케네디는 도덕주의자로서 글을 쓰며, 그녀의 등장인물들은 꽤 정확하게 칠죄종(七罪宗)과 대응한다.
멘델손은 초판의 책 재킷에 이 소설의 기원이 케네디와 몇몇 친구들이 칠죄종을 소재로 단편집을 만들려 했던 계획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고 지적한다. 내 친구 존 바라크가 지적했듯,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거의 존 버니언의 우화에 나오는 이름들 같다.
조금만 손보면 우리는 이런 우화를 얻게 된다. 분노(Wrath)의 랙스턴 캐넌, 음욕(Lechery)의 애나 르셴, 탐욕(Covetousness)의 코브 부인이 모두 나태(Sloth)의 시달 가족이 운영하는 호텔의 손님이며, 그 호텔에서는 질투(Envy)의 엘리스가 시중을 든다.
그 호텔이 절벽 아래로 무너질 때, ‘소돔 호텔’ 안에는 과연 몇 명이 남아 있을지 한번 맞혀 보겠는가?
이 책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헤베조차도 처절한 보속의 행위를 통해 편을 바꾼다. 모든 위대한 도덕주의자가 그렇듯, 케네디는 동시에 매우 엄격하고, 매우 섬세하며, 매우 우스꽝스럽다.
낸시벨은 브루스를 보는 순간 싫어한다. 그녀가 처음 브루스를 만난 것은 그가 낸시벨의 친구 앨리스와 시내에 나와 있을 때였다.
『그녀는 그에게 잘못된 것이 그렇게 많지만 않았다면 그를 좋아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했다. 그의 억양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다. 런던 서민층의 코크니 억양이라는 토대 위에 세련된 말투를 덧씌운 꼴이었다. 그가 사용하는 관용구의 절반은 최근 들어 어느 한 사람에게서 그대로 주워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 표현들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그의 말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그는 언제나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마린 퍼레이드에 대해서도, 자신의 지적인 친구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미천한 출신에 대해서도. 그것도 바로 자기 앞에서 뽐내고 있다는 사실을 낸시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둔한 앨리스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신학적 틀 안에 놓여 있다.
시달 씨는 소극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믿을 만한 철학자다. 그는 기퍼드 부인과 대화하면서 소돔의 롯을 언급하고 이렇게 추측한다.
“인류는 부당한 고통, 곧 아무런 죄 없이 고통받는 이들에 의해 보호되고 지탱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악의 대가를 대신 치르면서, 그저 그곳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수많은 무력한 사람들이 말입니다. 마치 멸망할 도성 안에 롯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억압받는 사람들이 억압하는 사람들을 보존해 줍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펑 하고 사라져 버릴 겁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렇게 추측한다. 단 한 명의 무고한 사람도 없는, 철저하게 악한 사회가 존재한다면,
“아마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삼켜 버릴 것”이며, “도덕적 원자를 분열시켜 버릴 것”이라고. (이 정도면 복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코브 집안 아이들은 잔치에 참석해 본 적조차 없고, 하물며 잔치를 열어 본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런데 보트 신부의 본당에서 거행된 성찬례에서 영감을 받은 아이들은 바닷가재를 잡아 호텔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요리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낸시벨이 바닷가재 한 마리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모드 코브가 대답한다.
“빵과 물고기는요?”
낸시벨은 바닷가재를 더 사 온다. 그동안 코브 집안 아이들은 초대장을 직접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에드워드 리어의 작품 속 등장인물처럼 옷을 입고, 낭송할 시 몇 구절을 외워 오라고 부탁한다.
이 장면은 마치 『바베트의 만찬』에서 그대로 나온 듯하다. 음식과 노래가 함께하는 일종의 ‘용서의 잔치’다. 거기에 호크 와인 네 병까지 더해지면서 모두의 기쁨은 더욱 커진다.
코브 집안 아이들이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은 대접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데서다.
“코브 집안 아이들은 너무 행복해서 노래조차 부를 수 없었고, 너무 행복해서 먹을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사람들 사이를 돌며 손님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권했다. 자신들이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잔치를 이끌었고, 모든 일이 마땅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보살폈다.”
참으로 세상의 종말 바로 가장자리에서 벌어진 잔치다.
케네디는 자신의 등장인물들이 내세우는 허울에 도전하고, 동시에 우리의 허울에도 도전한다.
당신이라면 아이들이 여는 바닷가재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그 초대를 받아들이겠는가?
그것도 너무나 가난해서 안쓰럽기까지 한 아이들, 당신이 베풀어 준 호의를 평생 갚을 수도 없는 아이들이 여는 잔치라면?
당신은 에드워드 리어의 등장인물처럼 옷을 입겠는가?
당신의 목숨이 그 초대를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면 그래도 받아들이겠는가?
그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