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말은 개인의 말이 아니다. 특히 광복절 경축사는 대한민국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무엇을 지키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밝히는 국가적 선언에 가깝다. 역대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통해 그 정부의 역사관과 국가관, 대북관과 외교·안보 노선을 읽어온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제81주년 광복절 경축사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대목을 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밝힌 원칙이라며 “북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으며,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다시 확인했다. 이어 이를 토대로 ‘서로를 존중하는 포용적 평화 공존’을 대북정책의 첫 번째 기조로 제시했다.
문제는 바로 ‘북의 체제를 존중한다’는 표현이다.
외교적 차원에서 상대 정권의 실재를 인정하고 무력에 의한 체제 변경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체제를 ‘존중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부는 이를 흡수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평화공존의 현실적 표현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통령에게는 그보다 먼저 지켜야 할 가치의 선이 있다.
우리가 존중해야 할 것은 북한 주민의 생명과 자유와 존엄이지, 그들을 억압해 온 체제가 아니다.
유엔 인권기구는 북한에서 정치범수용소, 강제실종, 사형제도의 확대, 표현과 정보 접근의 극심한 통제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25년 유엔 인권보고 역시 지난 10년간 북한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으며 억압과 공포가 심화됐다고 평가했다.
그런 체제를 대한민국이 왜 ‘존중’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역사는 북한 체제와 전혀 다른 선택을 통해 만들어졌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국가를 세웠고, 6·25전쟁의 참화를 딛고 산업화를 이루었으며, 민주화를 거쳐 오늘의 번영에 도달했다. 반면 북한은 세습 권력과 일당독재, 주민 통제와 핵·미사일 개발의 길을 걸어왔다.
남북이 같은 언어와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사실과 남북의 체제까지 동일한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히려 분단 이후 대한민국이 걸어온 역사는 어느 체제가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더 보장했는가를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는 역사다. 그렇다면 광복절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말해야 할 것은 북한 권력체제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존중이어야 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번 경축사의 안보 인식이다.
연설 전문에서 ‘동맹’과 ‘한미’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유’와 ‘6·25’ 역시 찾아볼 수 없다. 반면 북한을 향해서는 체제 존중, 포용적 평화공존, 선제적이고 지속적인 평화조치,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과 종전 논의가 제시됐다. 북한 핵에 대해서도 “핵 능력 고도화를 멈출 실효적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고 표현했다.
물론 한 차례의 경축사에서 모든 외교·안보 현안을 언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미동맹이라는 단어가 빠졌다는 사실만으로 정부가 동맹을 포기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무엇을 말했는가 못지않게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도 대통령의 국가적 연설에서는 중요하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기반으로 발전한 한미동맹은 한반도 전쟁 억제와 대한민국 안보체제의 핵심 축으로 기능해 왔다. 미국 국무부 역시 한미동맹이 6·25전쟁에서 형성돼 상호방위조약으로 제도화됐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한국 외교부 역시 동맹을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해 온 기반으로 평가해 왔다.
그런 현실에서 북한에는 ‘체제 존중’을 선언하면서 대한민국을 지켜온 동맹과 자유의 가치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면 그 균형은 심각한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민족이기 때문에 전쟁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민족이기 때문에 핵무기가 사라진 것도 아니며, 민족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도 아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독재정권의 성격까지 흐릿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민족은 혈연과 역사의 공동체이지만, 동맹은 자유와 생존을 지키기 위한 국가전략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은 추상적인 ‘민족’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며,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체제는 북한 체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다.
북한 주민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 전체주의적 세습독재체제까지 존중해야 할 이유는 없다. 대한민국이 존중해야 할 것은 자유이고, 지켜야 할 것은 국민이며, 강화해야 할 것은 자유민주국가들과의 연대와 동맹이다.
8·15 경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의 역사관과 국가관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이번 경축사가 남긴 질문은 무겁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존중해야 할 체제는 과연 어느 체제인가. 그 답만큼은 한 치의 모호함도 없어야 한다.
<論 說 委 員 室>